아론 버 (Aaron Bur)는 왜? (3)
(지난 주에 이어)
19세기 부패 정치, 혹은 정재계의 검은 커넥션의 아이콘으로 20세기 개혁가의 눈으로 보자면 ‘적폐’의 총 집합소 같았던 태머니 홀 (Tammany Hall). 태머니홀은 1780년대 말, 퇴역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애국과 친교, 자선 등을 목표로 설립된 단체지만, 19세기 전반에 걸쳐 뉴욕시, 더 나아가서 뉴욕주 전체, 때로는 전국단위의 정치에 있어서 한때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던 민주당의 파벌 (political machine)조직으로서 존재했다.
어쨌거나 태머니 홀의 초대 수장이 바로 아론 버였다. 그리고 태머니홀은 현재 권력의 핵심인 연방파의 귀족주의적인 성향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중산층’을 대변하는 민주공화주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언급했다시피 뉴욕은 당시 연방파의 아성이었고, 그 연방파의 수장은 바로 알렉산더 해밀튼이었다. 민주공화파의 이념적 토대를 지닌 아론 버와 연방파의 수장 해밀튼은 뉴욕이라는 공통 기반의 지분을 앞에 두고 있는 이상은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론 버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현직 대통령 아담스와 정치 거물 제퍼슨 간의 두번째 격돌이 될 줄 알았던 1800년 선거에서 아론 버는 아담스를 일찌감치 따돌리고 제퍼슨과 동점을 얻어냈다.
같은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대립한 두 거물 아론 버와 알렉산더 해밀튼이 불화했던 것이 이해불가능한 일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건인 그 1800년 선거의 결과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다. 연방파를 계승한 연방주의당 (Federalist Party)에서 한 명의 후보인 2대 대통령 존 아담스를 내세웠고, 민주 공화당 출신으로는 토머스 제퍼슨과 아론 버 두 사람의 후보가 나왔으며, 연방주의당은 아직까지는 집권당으로서 더 많은 의석까지 차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아담스가 당선되고 득표수가 같았던 제퍼슨과 버 중에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택하게 된다든지, 적어도 아담스가 차점자로 부통령이 된다든지 했어야하지 않을까?
물론 흑색 선전이 난무했던 이 1800년 선거에서 제퍼슨 진영으로부터 ‘위선자, 범죄자, 독재자, 무능력자, 친영파’와 같은 비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퍼슨 역시 흑색선전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해밀튼을 비롯한 뉴욕 중심의 연방주의 세력이 아담스대통령을 돕는 데 미온적이었던 데 있지 않았을까?
1대 워싱턴 대통령의 경우 해밀튼에 대한 신임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대외정책과 재무 문제 등에 있어 해밀튼은 워싱턴 대통령의 브레인이었다. 그러나 워싱턴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치러진 1796년 선거에서 해밀튼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아담스 대신 핑크니를 지지했더랬다. 한편 대외 정책에 있어 급진적 연방주의자였던 해밀튼은 온건한 연방주의자였던 아담스와 아담스 대통령의 재임 내내 갈등했다. 아담스가 대통령으로서의 인기를 잃어가는 동안, 해밀튼은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 기간이었다. 대신 제퍼슨이 한 때는 친구였던 아담스와 싸늘히 결별한 대신 오랜 정적이었던 해밀튼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여곡절끝에, 해밀튼은 1800년 선거에서 공식적으로 라이벌 구도였던 제퍼슨을 지원했다. 말하자면 가장 급진적 연방주의 그룹이 민주 공화파의 리더를 지원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적의 적은 필요에 따라 동지가 되는 이치라고나 할까.
“우리는 모두 민주공화파이며, 우리는 모두 연방파입니다” 제퍼슨이 취임 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두 정파 혹은 정당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탕평의 언사같지만, 사실 토마스 제퍼슨은 집권 초기 오랜 지원세력인 버지니아 중심의 민주공화파와, 그의 대권 승리에 사실상 최대 지분을 가지고 있는 뉴잉글랜드의 급진적인 연방파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었다. 결국 퍼슨은 뉴잉글랜드를 기반으로한 변호사, 상인,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인 연방주의자들이 제퍼슨에 반기를 들기로 하고, 에섹스 준토 (Essex Junto)라고 하는 결사를 구성했다. (이들이 나중에 1812년 전쟁에서 공공연히 영국 편을 드는 이들이다) 그리고 연방파가 장악한 뉴잉글랜드, 펜실베니아, 뉴욕등을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시키는 북부연방의 안을 제안했다.
에섹스 준토는 북부연방의 분리독립안을 뉴욕주의 주지사 선거와 결부시키고자했다. 뉴욕 주지사 선거를 이기고 뉴욕을 장악한 후 뉴잉글랜드 지역을 연방으로부터 탈퇴시키는 이 안에, 그러나 해밀튼이 반대했다. 가장 강력한 연방주의자 해밀튼이 연방을 깰 수는 없었던 것.
여기서 또하나의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해밀튼이 거부한 북부연방의 안은 다소 억울하게 부통령직에 머물게 된 아론 버의 몫이 된것. 그러나 아론 버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했다. 물론, 해밀튼의 거센 비판이 있었다. “반란을 도모하는 아론 버.” 해밀튼 때문에 두 번의 중요한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다고 생각한 아론 버의 해밀튼에 대한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아론 버가 해밀튼에게 결투를 신청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결과적으로 해밀튼은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뉴저지에서는 결투가 불법이 아니었기때문에 아론 버가 해밀튼의 죽음과 관련해서 법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제퍼슨과도 갈등의 골이 깊어진 아론 버가 해밀튼과의 결투 이후 치러야했던 댓가는 혹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