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만 침공: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1959년 쿠바 혁명
1959년 1월 1일. 부패한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에 등돌린 쿠바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변호사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 세력이 쿠바의 정권을 잡았다. 1953년부터 시작된 혁명군의 무장 투쟁 끝에 쿠바의 공산 혁명이 완성된 날이다.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는 1940년 제 9대 쿠바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1940년대 초반 쿠바의 경제적 번영기를 이끌기도 했던 인물이다. 1944년 권좌에서 내려온 후 8년 간의 공백기 후에 1952년 선거에 재출마했다가 낙선하지만,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쿠데타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한다. 바티스타의 쿠데타는 카스트로가 “추락한 헌법의 위상을 지키기 위한”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어쨌거나 쿠데타로 국가 권력을 장악한 바티스타는,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권력에 기댄 부패한 독재자의 본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언론과 대학을 통제하고 의회를 장악했으며, 부정 축재로 개인의 재산을 늘려나갔다. 동시에 쿠바 민초들의 삶은 파탄나고 있었다. 내부적으로 범죄적이고도 무능한 정권이 문제라면, 외부적으로는 쿠바의 경제를 주무르는 미국 기업의 수탈이 문제였다. 바티스타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독재를 보장해주고, 바티스타는 미국 기업들의 편안한 이권 추구를 보장해주는 관계였다. 1959년당시 쿠바의 광산, 목장, 정유 시설의 80퍼센트 이상, 철도의 50퍼센트, 설탕 산업의 40퍼센트는 미국 기업의 소유였다고 한다.*
1959년 혁명 이후 카스트로는, 사회주의적인 사회 경제적 개혁에 착수했다. 가령,외국(미국) 기업의 자본을 몰수, 국유화했으며, 토지를 재분배하는 한편, 도시 거주민의 주택 소유를 1채로 제한하는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쿠바의 혁명은 미국에게 커다란 충격을 (그리고 손해를) 가져왔다. 쿠바의 공산주의적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었든,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복이었든, 1961년 초 케네디 행정부는 정부 출범과 함께 쿠바와의 국교를 단절했다.
1961년 피그스만 침공, 처참한 실패
미국이 외교 관계를 중단하는데서 멈췄으면 적어도 대외적으로 스타일 구기는 일이 없었을 것을… 1961년 4월 4일, 케네디 대통령은 <피그스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이라는 군사 작전을 승인하는데, 앞으로 펼쳐질 불행의 돌이킬 수 없는 서막이 된다. 케네디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시절 CIA가 기획한 피그스만 침공은 쿠바 망명자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킨 후 쿠바로 침투시켜 反카스트로 반란을 일으키려던 작전이다. (애초에 미국은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한 군사 작전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쿠바에서 쿠바인에 의해, 쿠바 일반 사람들이 동조하는, 현 쿠바 정권에 대한 도발처럼 보이는 피그스만 침공을 계획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구상 자체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1961년 4월 15일, 미군의 폭격기 B26이 쿠바 남해의 피그스만을 공습했다. 이틀 뒤인 4월 17일 1500명의 쿠바 망명자들로 이루어진 2506여단 병력이 쿠바 남쪽의 피그스만에 상륙했다. 그러나 15일의 폭격 이후 이미 쿠바군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게다가 미국은 늪지대인 피그스만 지역의 지형 특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1500명의 병력 중, 118명은 사망하고 1189명은 쿠바군의 포로가 되었으니 피그스만 침공은 처참하게 실패한 군사 작전이었다. 게다가 피그스만 침공은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이 아니라, 소련이 쿠바와 결속해 쿠바의 “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생포된 포로들은 5300만 달러의 의약품과 식품을 쿠바 측에 제공한 후에 풀려날 수 있었다.
사실 피그스만 침공은 케네디 집권 이전에 계획과 망명자들에 대한 군사훈련까지 CIA 주도 하에 모든 것이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그스만 침공 작전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역할은 마지막 단계의 “결재”뿐이었다. 그렇다해도, 그 최종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이 어처구니 없는 작전과 그 실패에 대한 사과를 했고, 왜 바보 같이 그런 어처구니 없는 작전을 승인했는지를 한탄했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피그스만 침공 사건은 왜 간혹 똑똑한 사람들이 여럿 모여서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 이르게되는 지를 이야기하는 집단사고(groupthink) 이론의 유명한 예가 되었다.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CIA 수뇌부와 국방부의 최고 브레인들이 모여서 “카스트로를 제거해야 한다”는 한마음 한뜻으로 모였으나, 그들의 비슷한(homogenous) 시각은 시간이 지날 수록 집단의 결정 (즉, 피그스만 침공, 쿠바인들에 의한 쿠바 정권 전복 시나리오) 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국 현실성을 망각하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 집단사고 이론이다.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국정원의 (내국인 사찰이 의심되는) 해킹 의혹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왜 엘리트 집단이 모인 국정원이 그 모양인지 의심되는 순간 피그스만 침공 사건이 생각났다. 이제 보니 첩보 영화 베를린의 카피는 명언이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참고:
올리버스톤, 피터 커즈닉 지음/ 이광일 역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1>, 도서출판 들녁
송기도 | 미국은 왜 쿠바를 끌어안았을까: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 <월간 인물과 사상> 2015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