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사회주의자’, 그리고 최근 한 세기의 미국사
“미국에 정치 혁명이 필요하다… 대형 은행 해체와 조세제도 개혁 등을 통해 극소수 재벌에 편중돼 있는 부를 중산층과 빈곤층에 재분배해야 한다,” “(오바마 케어가 아니라) 연방 정부 프로그램인 메디케어를 확대·보완해,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단일 공보험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옳다.” (미 대선 샌더스 돌풍 이어지나, 집회에 1만명 모여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 2015년 7월 3일)
민주-공화 양당이 중앙 정치를 독식하는 미국에, 미국 예외주의가 논제가 될만큼 좌파나 사회주의 기반이 미미한 미국에, 북유럽 사민주의 색채를 내세우는 좌파-무소속 정치인이 설 자리가 있을 줄이야. 필자의 주관적인 기준으로는, 최근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의 존재감이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와, 아버지-형을 이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젭 부시와, 민주당 후보 몫은 당연히 그녀의 것이 되리라고 여겼던 힐러리 클린턴의 그것보다 크게 느껴질 정도다. 상위 1%의 부를 조세 개혁을 통해 재분배해야 하고, 대형 금융 기관을 규제해야 한다고, 월가랑 맞짱 뜨자는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라니!
기업의 대규모 후원이 없기 때문에 샌더스 진영의 경선 자금 모금 총액은 거물급 정치인들에 미치지 못한다. 지난 7월을 기준으로, 샌더스 캠프는 힐러리 진영의 1/3에 못 미치는 1,5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신선했던 것은 샌더스에게 지갑을 연 사람들 대부분이 200달러 미만의 소액 기부자들이었고, 그들의 평균 기부 액수는 33달러라고 하는 대목이었다. 후원자의 수로 전체 기부자의 3%만이 소액 기부자인 젭 부시보다 훨씬 압도적일 것이다. 대선은 커녕 민주당 경선을 돌파하기도 힘들것 같은 그에게 “돌풍”이라는 말이 따라붙은 까닭일 게다.
<옵저버>가 몇 주 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샌더스는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가족, 성장 과정의 에피소드 등 개인사를 통해 대중에게 어필하기보다는 직접적인 메세지로 다가가려는 정치인이다. 하지만 샌더스 개인의 삶의 궤적은 그 자체로 지난 세기 미국의 “역사”를 함께 겪었던 많은 이들의 그것과 여러 모로 포개진다.
버니 샌더스는 1941년 뉴욕 부르클린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도 뉴욕에서 태어났다. 이 칼럼에서 몇 번 소개했다시피 2차 산업 혁명으로 경제 규모가 크게 성장했던 1880년 무렵, 미국으로의 이민이 급증했다. 이 시기에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가난한 동부 및 남부 유럽 출신 노동계급 이민자들은 대도시 슬럼가의 덤벨 테너먼트(좁은 공간에 건물 면적을 극대화한 다세대 주택)에 거주했다. 아마도 샌더스의 조부모들도 그들 중 일부였던 듯하다.
1921년과 24년 통과된 이민 제한법의 사실상 타겟은 바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주해왔던 샌더스의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다. 도시의 빈민가에 거주하고, 저임금의 노동력을 제공했던, 그리고 언어와 종교와 인종의 차이로 인해 노골적인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 어쨌거나 그 당시 몰려든 이민자의 후손들이 현재 미국 인구의 40%를 구성하고 있다. 브루클린에서 이민자 가정들에 둘러쌓여 자란 샌더스는 “양질의 교육이 없이는 잘 살 수가 없었기에 내 이웃의 이민자 가족들은 모두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가난한 이민자 커뮤니티에서의 어린 시절은 대학 등록금에 대한 샌더스의 파격적인 제안이 등장한 배경이었을지도.
41년생인 샌더스가 브루클린 칼리지를 거쳐 시카고 대학으로 트랜스퍼를 하고 졸업을 했던 60년대는 미국의 격동기였다. 대학생 시절 샌더스는 청년 사회주의자 연맹(Young People’s Socialist League)의 일원이기도 했고, 반전, 비폭력,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1970년대 초반 출범했던 자유연합당(Liberty Union Party)에도 참여했다. 인종 평등회의(CORE: Congress of Racial Equality)와 학생 비폭력 조직 의회(SNCC: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등 민권 운동 단체에서 조직책으로 활동하는 등 샌더스는 흑인 민권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마틴 루터킹 목사가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남긴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의 현장 어딘가에도 샌더스가 있었다.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 그리고 여성 운동 등 마이너리티 운동이 활발하던 60년대의 격랑은, 이에 대한 반발로서 보수가 재결집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1968년과 72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변화를 요구하는 소리가 거센 것 같지만) 침묵하는 미국인 다수는 여전히 보수”라는 말로 “상처 입은” 보수적 백인들의 표를 집결시켰다.
“기업에 대한 탈규제, 작은 정부”를 내세운 레이건을 당선시킨 1980년 대선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체제로 재편되던 때다. 이무렵 샌더스는 버몬트 주 벌링턴 시의 시장으로서 정치 인생을 시작한다. 샌더스는 이어진 몇 차례의 시장 선거에서 주류 정당 출신 후보들에게 승리했고, 1990년대에는 미의회에 진출한다. 샌더스의 의정 활동 이력을 보니, 1990년대 이후의 미국 정치 이슈는 보다 다각화되어 금융 규제, 테러와의 전쟁 등에서부터 동성애, 출산 선택( Prolife vs. Prochoice) 등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했었다는 점이 새삼 각인된다. 어쩌면 샌더스는 지금 레이건의 프레임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샌더스에게 민주당 경선이라는 1차 관문을 뚫는 것조차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레이건의 프레임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다. 그 점에서 샌더스의 선전을 기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