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 History 입체 노트정리 마지막 키워드: 종교와 개혁 운동

by help posted Feb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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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History 입체 노트정리 마지막 키워드: 종교와 개혁 운동

 

소피아의 <오늘, 다시 읽는 미국사> 칼럼이 US History의 AP 및 SAT Subject 테스트를 앞둔 수험생들을 위한 학습 팁 시리즈로 연재중입니다. Social Studies에서 주어진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이해하는 습관을 가지기를 원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소피아의 <오늘, 다시 읽는 미국사> 칼럼이 US History의 AP 및 SAT Subject 테스트를 앞둔 수험생들을 위한 학습 팁 시리즈로 연재중입니다. Social Studies에서 주어진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이해하는 습관을 가지기를 원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회 운동의 흐름을 포착하라 


미국사 노트 정리 시리즈의 마지막 테마는 각종 사회 개혁 운동이다.시험을 위한 노트 정리에서 개혁 운동을 강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각종 사회 운동이 미국 사회 내의 사회 문화적 변화와 갈등, 그리고 발전을 가늠케 하는 일종의 표시석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시험에서도 골고루 출제되고 있다. 


특히 1, 2차 종교 대 각성 (Great Awakening) 운동, 19세기 개혁운동 (Antebellum Reform Movements), 19세기 노동운동과 인민주의 (Populism), 20세기 혁신주의 (Progressivism), 흑인 민권 운동 (Civil Right Movements, 1950s~1960s), 19세기와 20세기의 여성운동, 1960~70년대 반전 운동과 신좌파의 등장까지는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지면상 종교와 개혁운동에만 국한함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종교 대각성: 사회 변화에 대한 저항 운동


따지고 보면 역사란 대통령과 정당, 법, 전쟁과 같은 뭔가‘공식적인 (official)’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상기시켜주는 기제가 바로 사회 개혁운동이라는 테마다. 


가령 식민지 시기인 1730년에서 1740년 경의 1차 종교 대각성 운동(First Great Awakening)과 건국 초기의 2차 종교 대각성운동(Second Great Awakening)의 공통점으로 대체로 기득권이나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참여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1630~40년대 청교도들이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올때는 분명 종교적 자유에 대한 열망과 순수성의 신앙이 존재했을터이다. 하지만 그렇게 성장한 식민지의 청교도 공동체는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고유한 종교적 체험에 대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1세대 청교도 이주민들의 신앙적 순수성은 2대, 3대째에 이르면서 점차 퇴색되어 갔다. 교회 성원이 되기 위한 요건을 약화시켜 교세를 잃지 않으려던 Half Way Covenant의 노력등이 있긴 했지만, 경제적 성장과 함께 찾아온 세속화와 타락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신학조차 합리성과 지성에만 치우쳐있었다. 


1차 대각성운동은 바로 이러한 사회변화에 대한 반성과 저항으로, 감성적이고 순수한 신앙의 형태를 주장했던 부흥운동이었다. 부상하는 상공업 질서에 밀려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과, 기존 교회 질서에서 적장자에 비해 차별받는 입장에 있던 차남, 여성들에게서 폭넓은 호응을 받았다. 

2차 대각성운동의 경우, 독립 혁명과 함께 “정치와 종교의 분리 (수정헌법 제 1조의 일부)”가 이루어진 상황,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더이상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며, 자연의 섭리를 아는 것이 창조의 섭리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신론 (혹은 자연신론 Diesm)의 발흥, 또한 과학주의의 태동과 함께 “미신에 대한 배격”이 팽배해진 현상에 대한 반발로서 일어난 또 하나의 대규모 부흥운동이다. 

2차 대각성 운동은 교외의 캠프 집회 (Camp meetings)로 특징지어지는데, 1차 대각성때처럼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은 집단에게 특별한 호응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원주민 인디언들과 흑인 노예들도 참여하였다. 
1차 대각성운동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혹은 장로교 내의 Old Light과 New Light 등의 종교적 분파로 귀결되었다면, 2차 대각성 운동을 통해서는 안식교 (Seventh-day Adventists), 그리스도의 교회 (Church of Christ), 몰몬교 (Mormonism), 셰이커 등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대대적인 사회 운동으로 범주화할수는 없지만 1920년 전후, 그리고 1960~70년의 문화적 혹은 사회적 격변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독교적 근본주의의 가치를 들고나오곤 했었다. 즉,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면서 불거진 Scopes Trial (1925, 일명 원숭이 재판)은 과학주의와 도시문화에 대한 남서부 농촌의 문화적 반발과 무관하지 않으며, 신좌파(New Left) 반문화 (Counter Culture)의 물결에 대한 반작용은 1970년대 이후 기독교 근본주의가 공화당의 신보수주의 프레임을 통해 (혹은 공화당이 정치적 외연을 확대하려는 노력 속에) 재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기독교, 때로는 사회 개혁을 주도했다. 


때로는 기독교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개혁 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세기 개혁운동 (Antebellum Reform Movements)과 20세기의 혁신주의 (Progressivism)을 주도했던 다수의 사람들은 기독교적 동기로부터 사회 개혁을 꿈꾸었다. 

19세기 전반 개혁운동은 남성에 비해 보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죄악으로부터) 순수한 존재라는 문화적 역할을 지녔던 여성들이 주축이 된 경우가 많은데, 노예제 폐지 운동 (Abolition)이나 절주 (Temperance)운동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의 사회 개혁운동은 기독교적 이상을 세상에 실제로 완성하려는 Perfectionism과 무관하지 않다.

어쨌거나 종교와 도덕에 기댄 19세기 전반 개혁운동은 Horace Mann-공립교육, Dorothea Dix-수용시설 (Asylum)개혁,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 – 노예 해방 운동 하는 식으로 주요 인물과 개혁 내용을 연관 짓는 문제가 간혹 출제된다. 

20세기 초반의 혁신주의에도 기독교적 영향이 곧잘 발견된다. 가령 “천국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사회 복음(Social Gospel)이 사회 복지 개혁에 영향을 끼쳤다. 1918년의 수정헌법 18조 (금주법)의 제정에서도 효율성, 근면, 금욕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가 작동했다. 

단, 19세기 개혁운동과 20세기 혁신주의는 기독교의 영향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원인과 결과가 다양한 사회 운동이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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