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퍼스트 레이디, 엘레노어 루즈벨트 (1884~1962)를 추억하다

by help posted Feb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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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퍼스트 레이디, 엘레노어 루즈벨트 (1884~1962)를 추억하다

 

2012년 9월 4일, 민주당 전국 전당대회 


“그들 (미셸 오바마의 아버지와 버락 오바마의 할머니)는 단지 가진 것이 별로 없이 시작한 사람이라고 해도, 열심히 일한다면 잘 살 수 있다는, 심지어 다음 세대에게는 더 나은 삶을 물려줄 수 있다는 미국의 근본적 약속을 믿었습니다. … 경제를 재건하는 문제에 있어 버락은 나의 아버지라든가 자신의 할머니 같은 사람들을 생각해왔습니다…”* 

지난 화요일 민주당 전국 전당대회에서 미셸 오바마가 연단에 섰을 때, 많은 사람들은 <위 러브 미셸>을 연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연설이 끝나갈 때 쯤, 나는 생각했다. 숱한 (대개 남성) 정치인들이 평범한 사람들을, 심지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겠다고 할 때는 느끼기 힘들었던 강한 힘이 미셸에게는 있구나. 청중들의 촉촉한 눈가, 강한 공감의 끄덕임들을 보았다.“우리는 미셸을 사랑한다”는 그 말에도,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왜 그들은 미셸 오바마를 사랑할까?

엘리노어 루즈벨트, 뉴딜의 양심 


미셸 오바마의 연설을 보면서 생각난 사람이 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엘리노어 루즈벨트 (Eleanor Roosevelt). 엘리노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재임 12년 간, 그의 여성 및 소수자, 인권, 빈곤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경제의 사다리 제일 아래에 있는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이라는 뉴딜의 초심을 반영하는 정책들에는 엘리노어의 공헌이 컸다. 덕분에 “퍼스트 레이디” 엘리노어에게는 뉴딜의 양심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루즈벨트 재임기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링컨의!)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지지노선을 대거 변경했다. 여기에는 뉴딜의 저소득층 정책과 더불어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엘리노어의 공개적인 행보가 큰 역할을 했다. 아직은 흑백 분리법이 존재하던 시절이다. 1939년, 미국 혁명의 딸들 (Daughters of American Revolution: DAR)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전설의 콘트라 알토 가수였던 매리언 앤더슨의 백악관 컨스티튜션 홀에서 공연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엘리노어가 공개적으로 앤더슨의 편에 섰던 것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이래저래 엘리노어는 가장 사랑 받고 가장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였다. 

전직 퍼스트 레이디? 


사실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부터 엘리노어는 주당 48 시간 노동, 아동노동 금지, 최저임금제 등을 실현하기 위한 여성노동조합연맹(Women's Trade Union League: WTUL)의 활동에 참여했었다. 


그런데 남편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사망과 함께 백악관에서 나온 후에도 엘리노어의 여성, 인권 분야의 활동은 더욱 왕성해졌다. 1945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재임기 부통령으로서 루즈벨트의 대통령직을 승계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엘리노어 루즈벨트를 UN 총회의 미국 대표로 파견했는데, 여기서 엘리노어는 인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인권 선언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UDHR) 채택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 여성 지위 위원회 (Presidential 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를 설치하는데, 엘리노어는 이듬 해 사망할 때까지 이 여성 지위 위원회에서 일했다.

물질적으로 풍족했지만 가족의 사랑을 누리지 못했고, 빼어난 미모의 어머니 덕에 외모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내성적인 어린 시절 엘리노어는 분명 가난한, 하지만 화목했던 흑인 가정에서 자란 미셸 오바마와 다르다. 오바마 부부가 꽤 잉꼬부부지만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는 죽는 순간까지 공공연한 불륜이 있었으니 이 또한 전혀 다르다. 

내가 미셸의 연설을 보면서 엘리노어를 떠올린 것은 일단 그녀들이 공통적으로“정치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지만, 어지간한 직업 정치인들보다도 (혹은 그녀들의 남편들보다도)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퍼스트레이디들이기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은 단지 남편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보조적이고 수동적으로 웃고 있는 역할의 “영부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컨텐츠와 정치색에 대한 분명한 자신감, 그리고 타고난 공감 능력을 가지고 대중과 소통하는 데에서 탁월하다는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지난 주 전당대회 연설로 돌아가보자. 미셸 오바마의 연설은 정말 훌륭했다. 공화당의 오바마 비판에 대해 아주 세련되게 응수한다. “맞아, 우리는 이런 정채을 써. 그것이 옳기때문이야”라는 투다. 하지만‘공화당’이라든가 ‘롬니’같은 단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민주당이 공화당에게서 비판받는 정책의 핵심은 사실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이 즐겨찾는 ‘가족’이라고 역설한다. 그녀의 연설은 가르치려하지 않는다. 평범한 서민 가정에게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를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이야기하고, 그것이 지금 그녀의 남편이 추구하는 정치적 아젠다와는 무슨 연관이 있을 지를 풀어낼 뿐이다. 

하지만 감동은 다른 문제다. 미셸의 연설은 현란한 수사때문에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등록금의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직접 낸다는 것, 대학 등록금 납입 기일을 넘기기 전에 꼭 납부한다는 것, 그로써 자식들이 대학교육을 받게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던 한 사내의 딸이었던 그녀가 가진 진정성이라는 알맹이가 있는 연설이었기에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엘리노어의 힘이 소수자와 인권을 향한 그녀의 열정적 삶 자체에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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