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럼의 마녀 재판과 과거사 사과

by help posted Feb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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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의 마녀 재판과 과거사 사과

 

1692년 9월 22일 매사추세츠 세일럼. 마사 코레이 마가렛 스캇, 매리 이스티, 앨리스 파커, 앤 푸데터, 윌모 레드, 새뮤엘 와드월, 매리 파커, 이렇게 8인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죄목은 <마녀>. 


이 무렵, 하버드의 총장 인크리스 마터는 양심의 사례들 (Cases of conscience concerning evil spirits)을 출간, 빈약한 증거로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하는 마녀 재판의 중단을 요청했다. 

또한 그해 10월 초, 보스턴의 재력가이자 이후 하버드의 재무담당 등으로도 활약하게 되는 명망가인 토마스 브래틀 역시 세일럼의 마녀 재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편지 ("Letter of Thomas Brattle, F. R. S., 1692") 를 썼다. 

마녀 재판에 대한 비난 여론과 이들의 편지 등은 주지사였던 윌리엄 핍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곧이어 마녀 재판 법정이 공식적으로 중단 된다. 1692년 9월 22일 처형된 8인은 그해 1월 시작된 악명 높은 마녀재판으로 처형된 마지막 희생자가 되었다. 하지만 재판이 중단되었을 때는 이미 2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교수형을 당한 후 였다. 

소녀들의 발작과 마녀 재판 


사실 세일럼의 마녀 재판은 그 시작부터가 황당하다. 마녀 소동이 일어나기 고작 서너 해 전 세일럼에 새롭게 부임한 청교도 목사인 새뮤엘 패리스의 어린 딸 엘리자베스가 발작을 일으켰고, 며칠 뒤 그녀의 사촌 아비가일이 발작을 일으켰다. 그녀들의 증세는 <기도회>를 열어도 나아지기는 커녕, 마을의 다른 소녀들도 비슷한 발작 증세를 보이는 것. 이들을 진단해도 원인을 알수 없었던 마을의 의사는 소녀들의 발작이 사탄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마을은 수 많은 마녀를 색출하여 고발하고, 재판하고, 또 처형하기를 거듭하는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 처음에는 패리스 목사의 노예 티투바, 혹은 이미 과거부터 ‘행실’이 문제가 되던 사라 굿 같은 여인들이 마녀로 지목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마녀로 지목된 누군가를 변호하는 사람도, 혹은 마을에서 정숙하다고 정평난 여인들까지도 마녀라는 누명을 쓴다. 안타깝게도 소녀들의 발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더 많은 ‘마녀’들만이 감옥으로, 그리고 교수대로 보내질뿐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광기로 몰고갔는가?


17세기 말, 마녀 재판이라는 이 황당한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가장 고전적인 해석은 이미 내부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청교도 사회 내부의 위기의식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종교를 찾아 매사추세츠에 정착한 그들은 퀘이커나 카톨릭 등 타 종교 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배타적이었다. 세월이 지나 청교도 공동체의 초반의 정체성이 퇴색하는데, 이런 공동체 내부의 위기의 원인을 외부의 ‘사탄적인 것들’로 돌리는 집단 심리적 상태가 세일럼의 마녀사냥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태의 꽤 핵심에 서 있던 패리스 목사는 종종 “사탄과 싸워 이길 것”을 주문하는 설교를 했던 등의 정황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최근의 해석은 마녀 사냥이 벌어지기 전의 사회 경제적 변화에 특히 주목한다. 당시 세일럼 (현재의 세일럼)은 보스턴에 이어 어업과 무역으로 나날이 번창하던 타운이다. 이 과정에서 상업이 중심이 된 동쪽의 세일럼이 엄청난 부를 축적해가던 데 반해, 여전히 청교도적이고 농업이 위주였던 서쪽의 세일럼 빌리지 (현재의 덴버스)는 경제적으로 낙후해 있었다. 

갈등의 결과, 농업-청교도 인구는 상업인구의 세속화와 물질주의를 사탄적인 것으로 배격했다. 세일럼 빌리지의 유력한 집안인 퍼트넘가와 세일럼의 상업 경제의 핵심 세력인 포터가 간의 분쟁도 공공연했고, 교회도 패리스 목사의 고압적 청교도주의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놓고 둘로 갈라졌었다. 마녀 재판 당시 마녀 재판 중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이 중에 앤 퍼트남이라는 소녀가 있었던 것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또 다른 해석 중에는 티투바 혹은 사라 굿이 제일 먼저 마녀로 지목되었단 사실에서 암시되듯, 사회의 위기에 대한 해법이 ‘주변인’ 혹은 여성, 약자들에 대한 억압으로 분출되는 마녀 사냥의 일반적인 경향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세일럼이 마녀사냥이 벌어진 유일한 곳이 아니었기에 또한 타당성이 있는 주장일 것이다. 

그리고…참회 혹은 사과 


원인이 무엇이건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사건 후 300년이 지난 1992년, 세일럼 제일 교회는 공식적으로 당시의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을, 세일럼 타운은 ‘과거사 바로 세우기’를 진행했다. 당사자들 중에는 앤 퍼트남이 자신의 무고의 죄를 눈물로 참회했다. 이에 앞서 판사 중 1인이었던 섀무엘 슈월이 사건 종료 3년 후 공개 참회를 했다. 특히 섀무엘 슈월은 참회 후 흑인과 여성 인디언의 권리 신장에 앞장선다. 또 재판에 앞장섰던 호손 판사의 후손인 너대니얼 호손이 참회의 심정으로 ‘주홍글씨’를 썼다고 알려졌다. 


세일럼 재판 320년이 지난 오늘, ‘과거사’라는 단어를, 그리고 ‘사과’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사과의 방법은 누구나 다르다. 그래도 참회 없는 사과는 어쩌면 덥썩 받아들면 안되는 독사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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