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에 관하여 : 대법원장 얼 워렌 (Earl Warren, 1891~1974)

by help posted Feb 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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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에 관하여 : 대법원장 얼 워렌 (Earl Warren, 1891~1974)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된지 일주일이 지난 1963년 11월 29일, 케네디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 린든 존슨 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을 조사할 특별 진상 조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의 수장으로 임명된 당시 대법원장 얼 워렌의 이름을 따 특별 조사위원회는 워렌 위원회 (Warren Commission)로 불리게 된다.

알려져 있다시피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은 범행을 부인하던 용의자 오스왈드 (Lee Harvey Oswald)가 이송중이던 호송차에서 암살 당했기때문에 각종 음모론과 배후세력, 공범 등에 대한 설이 분분했던 듯하다. 약 10개월 간의 정보 수집과 조사 끝에 진상조사 위원회는 암살 사건에 대한 음모론적 해석을 부정하게 된다.


“케네디 암살 사건 진상 조사위원회의 조사 방식에 대한 의구점”이 모티브가 된 영화 JFK를 기억하는 필자 세대 독자들이 있지 않을까?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그 진상조사 위원회가 바로 워렌 위원회다. 케네디 암살사건에서 음모론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워렌도 사건의 공모자 중 하나로 취급할지도.

대법원장 워렌, 아이젠하워의 자책골


그런데 얼 워렌에게 있어 대법원장 워렌이라는 정체성이 워렌 위원회의 수장보다 역사적으로는 훨씬 중요하다. 건국 초기 전설의 대법원장 존 마샬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판결들을 다수 내놓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1950년대에서 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물결을 예보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 (Brown vs.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1954)이다. 집 근처의 백인 전용학교를 놔두고 흑인 전용 학교에 다니기 위해 매일 1마일을 도보로 통학해야했던 린다 브라운이라는 여대생이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얼 워렌 대법원은 브라운의 손을 들었다.19세기 말, “분리되었으되 평등하다 (separated but equal)”라는 판결을 통해 공공 시설 및 교육의 흑백 분리를 법적으로 정당화했던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1896)을 반세기 만에 뒤집으면서, 유명한 “(인종간) 분리는 본질적으로 차별적이다”라는 말을 남긴 기념비적인 판결이었다. 향후 이 판결은 미국 헌법 역사상 가장 중요한 판결로 평가받게 된다.

브라운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은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남부 백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던 것은 사실이다. 버지니아주는 “주의 권리”를 내세워 인종간 통합 교육을 실시하는 교육구에 불이익을 주는 주 법을 통과시켰고, 아칸사소 리틀락의 센트럴 고등학교에 등교하려는 흑인들을 저지하기 위해 아칸사소 주지사는 주 방위군을 동원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공화당)는 흑인학생들의 등교를 막아선 주 방위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내키지는 않지만” 연방 군대를 파견해야 했는데, “워렌을 대법원장에 앉힌 것은 나의 크나큰 실수”라고 자책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이젠하워가 “전직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워렌은 종신직인 대법원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 워렌의 “이른바 진보적” 판결은 브라운 판결에서 멈추지 않았다.

워렌 대법원, 1960년대


한편, 많은 이들이 워렌 대법원을 “진보적 판례”라는 특징으로 이해한다. 브라운 판결과는 별도로 워렌 대법원이 내린 1960년대 중반의 이른바 “적법 절차 (Due Process) 및 피고의 권리”와 관련된 일련의 판결들 때문이다. 가령 기드온 대 웨인라이트 (Gideon vs. Wainwright, 1963)는 범죄 용의자들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변호사비용을 낼 수 없는 피고자라면 국선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다. 더 나아가 1964년 에스코베도 대 일리노이 (Escobedo vs. Illinois, 1964)는 범죄 용의자의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는 체포 시점 혹은 범죄 조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마지막으로 미란다 대 아리조나 (Miranda vs. Arizona, 1966)은 피의자들도 자신들이 변호사 선임에 관한 권리 그리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고지 받을 권리, 즉 미란다 원칙을 확립한 판결이다.

많은 이들이 의아해하는 대목은 대법원장 워렌이1948년 당시 민주당의 트루먼에 맞선 토마스 듀이의 러닝 메이트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보수성향”의 인물로, 보수주의자 워렌과 “진보적 판결”들은 어딘지 매치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브라운 판결이라든가, 적법 절차 및 피고의 권리와 관련된 판결은 정말 “진보적 판결”일까? 일견 그리 보일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오랜기간 용인되던 것들을 뒤집은 것이니까.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워렌의 “진보적” 판결은 항상 헌법의 정신에 기댄 것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브라운 판결에서 얼 워렌은 인종간 분리가 수정 현법 14조의 “동등한 권리의 보호”라는 구절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주장했고, 적법절차와 관련된 판결들은 독립 혁명의 정신을 헌법에 반영하기 원했던 건국의 아버지들이 권리장전 (Bill of Rights)의 일부로서 수정헌법 4, 5, 6조 등에 명시했던 원칙을“명시”한 것이다. 결국, 워렌은 헌법 조항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해석을 내린 그런 보수주의자였다고 봐야 할 것같다.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런 보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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