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gregation Forever”는 영원하지 않았다.

by help posted Feb 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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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gregation Forever”는 영원하지 않았다.

 

1972년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 닉슨 (Richard Nixon)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종국에는 74년 닉슨을 임기중 사임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서막인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 (1972년 6월) 조차 대선 판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매사추세츠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닉슨이 선거인단 표를 가져갔기에, 말 그대로 “압승”이었다. 

 

선거 결과만 놓고 보면 닉슨의 압승은 역으로 민주당의 참패다. (닉슨의 성공 이유가 아니라) 민주당의 패인은 무엇이었을까? 민주당이 후보로 내세운 맥거번 (George McGovern)은 당내 분열을 해결하는 데에 실패했고, 부통령 후보를 세우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참고로 맥거번은 민주당내에서는 “레프트 윙” 혹은 반전주의, 자유주의자 그룹으로 분류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미 닉슨을 초선 시켰던 68년 선거 당시에도 민주당은 베트남전에 대한 지지여부를 둘러싸고, 그리고 민권법 등 인종 문제를 둘러싼 분열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패배를 자초한 바 있었다. 

 

1968년, 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 당시 부통령으로 재임했던 험프리는 린든 존슨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에 미국이 지속적으로 개입해야한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함으로써,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많은 민주당원들과 대립했다. 베트남전 확전에 반대하고 신속한 철군을 주장하면서 험프리의 반대 편에서 당내 경선에 참여했던 로버트 케네디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 당한 뒤 두 달 후 암살당했다. 

 

그런데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확대시킨 장본인인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민권법 (Civil Right Act of 1964)와 1965년 투표법 (Voting Right Act of 1965)을 제정시킴으로서, 2차대전 무렵부터 서서히 성장하여 50년대, 그리고 6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흑인 민권 운동사에 의미있게 기억 되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가 남부 민주당 출신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남부는 여전히 인종주의적이었고, 흑백간 인종분리 (Segregation)을 (백인들이) 지켜야할 “권리”라고 생각했다. 1948년, 트루먼 대통령 (민주당)이 군대 및 정부에서의 인종 분리 철폐안 (Executive Order 9981)에 서명했을 때 여전히 보수적이고 인종주의적이었던 남부 민주당원들이 States’ Right Democratic Party (일명 Dixiecrats)를 구성, 민주당으로부터  이탈했던 바 있다. 이 그림은 1967년에도 재현된다. 린든존슨의 민권법에 반발하는 (혹은 인종 분리를 주장하는) 남부민주당원들이 민주당에서 탈당, 미국 독립당 (American Independent Party)를 구성했다. 이어 1968년 선거에서는 앨러배마 주지사 출신의 월레스 (George Wallace)를 지명했다. 

 

배경지식이 전혀 없이는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을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까닭은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이 월레스라는 인물 때문이다. 이 분이 남긴 말 중 한 번 들으면 안 잊혀지는 구절이 있다. “Segregation Now, Segregation Forever” 1963년 1월, 앨러배마 주지사 취임연설에서다. 같은 해 5월 21일 연방 대법원이 앨러배마 대학에게 두 명의 흑인 학생 (Vivian Malone Jones와 James Hood)이 입학할 수 있도록 허가하라고 판결했다. 학생들의 등록일인 6월 11일, 월레스 주지사는 이들의 등교를 저지하기 위해 강의실을 막아선 채, “Segregation Now, Segregation Forever”를 외쳤다. 케네디 대통령이 보낸 연방군이 투입되었기때문에, 월레스의 “저지”는 성공하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는 남부의 <인종분리 철폐 반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월레스가 민주당에서 탈당하고 1968년 미국 독립당 창당에 힘을 보태고 대선 후보가 된 것이 그닥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놀랍다기보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면, 그 해 선거에서 월레스는 소수정당의 후보임에도 불구, 일반 유권자표의 13.53%를 획득 (선거인단 득표수 8.6%)했다는 점. 적어도 월레스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한 아칸소, 앨러배마, 조지아,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등 남부에서는 여전히 인종별 분리 철폐 (desegregation)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어쨌거나 월레스는 1970년 민주당으로 복귀하여 주지사가 되었고, 1972년 대선을 앞두고는 예비경선 후보가 되어 험프리, 맥거번등과 경쟁했다. 그러나 예비 경선 와중이던 1972 5월 15일, 월레스는 “뭔가 대담하고 드라마틱하고, 강력하고 역동적인”일을 통해 이목을 끌고 싶었던” 21세 청년 아서 브레머에게 총격을 받고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총격직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면서 치러진 예비 경선은 완주할 수 없었다.) 월레스는 1974년 앨러배마 주지사 선거에서 다시 출마, 당선이 되었고 1979년 주지사 임기를 마지막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반전이 있다. 주지사 임기를 마칠 때 쯤, 웰레스는 과거의 인종차별주의에서 결별하였노라는 선언을 했으며, 앨러배마의 흑인들에게 “과거사”를 사과했다. 그리고 월레스는 80년대에 다시 한 번 앨러배마 주지사가 되었다. 이번에는 흑인들의 앞도적인 추대와 지지가 월레스를 주지사로 만들었다. 

 

이 드라마틱한 사내의 정치적 반전은 어디서 왔을까? 개인적으로는, 그 간 남부 사회가 혹은 남부의 백인들이 거친 “성장”의 반영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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