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허친슨 재판 - 참을 수 없는 권력의 찌질함에 관하여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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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허친슨 재판 - 참을 수 없는 권력의 찌질함에 관하여

 

“That’s a matter of conscience, Sir. (그것은 양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1637년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에서 열린 한 재판.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의 초대 총독이자 청교도들에게 “언덕 위의 도시”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1629년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 건설을 주도했던    청교도 지도자 존 윈스럽 (John Winthrop)이 피고석에 앉은 앤 허친슨 (Anne Hutchinson)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분열을 조장하는 모임을 하는가?” 

윈스럽의 심문에 앤 허친슨이 답한다. 

“그것은 양심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앤 허친슨 (Anne Marbury)은 1591년 영국 링커셔 지방에서 태어났다. 영국 국교회 (Anglican Church) 성직자이자 교사였던 부친 프랜시스 말버리 (Francis Marbury)덕에, 그녀는 당시 여성치고는 교육을 받은 축에 속했다. 1612년, 앤 말버리는 상인인 남편 윌리암 허친슨 (William Hutchinson)을 만나 결혼하였고, 많은 자녀를 두었다. 1633년, 허친슨 부부는 그들이 추종했던 목사 존 코튼 (John Cotton)을 따라 열 한 명의 자녀와 함께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였다. 앤 허친슨은 이 곳에서 산파로 일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로 인해 여성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윌리엄 허친슨의 사업은 보스턴으로 이주하기 이전에 이미 크게 번창해있었다. 영국에서 상당한 재산을 가져온 허친슨 가족은 현재의 다운타운 보스톤 지역에 큰 규모의 주택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앤 허친슨은 “여가의 일환으로” 매주 여성들의 성경공부 모임을 개최하고 그 지역 목회자들의 주일 설교를 설명해주거나, 혹은 목사들의 설교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피력하곤 했다. 성직자도 설교자도 아닌 평신도, (게다가 남성도 아니었던!) 앤 허친슨이 개최하는 성경공부 모임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규모가 커졌고, 점차로 남성들까지 참여했는데, 개중에는 영향력있는 목회자와 치안판사도 포함되곤 했다. 

 

매사추세츠에서 축출당한 앤 허친슨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영적 신비주의자 그룹the spirit mystic에 가까웠던 허친슨은 하나님과 구원에 이르기 위해 개인의 성령에 대한 내적 교감과 주관적인 영적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적 입장을 지녔다. 허친슨 부인의 이러한 시각은, 같은 칼뱅주의 내에서도 신앙의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요소를 강조했던 당시 청교도 주류 성직자들의 입장과 어긋났다. 게다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청교도 문화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성직자를 거치지 않고도) 성경의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는, 여성-허친슨의 입장은 남성-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었다. 

 

식민지 총독으로 당선된 존 윈스럽을 위시한 주류 청교도 지도자들은 허친슨 부인을 재판대에 세워 그녀에 대한 종교적 사상검증을 시도한다. 앤 허친슨 자신의 해박한 성경지식과 양심에 대한 호소로서 스스로를 변론하였으나, “반란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회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로 청교도 공동체에 적합하지 않다 (unfit)” 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고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에서 축출된다. 

 

추방당한 앤 허친슨은 몇몇 추종자들 및 가족들과 함께 로드아일랜드로 이주했다. 그러나 몇 년 뒤인 1642년 남편 윌리엄 허친슨이 사망했고, 1643년 허친슨 부인과 남은 가족 대부분이 원주민에게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매사추세츠인들의 일부는 그녀의 불운한 죽음을 두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리되었다며 수근거렸다고 한다. 

 

앤 허친슨이 사망하고 약 반세기 후 뉴잉글랜드는 마녀사냥의 몸살을 앓았다. 잘 알려진 1692년 세일럼의 마녀 재판을 정점으로 사실상 과거의 청교도적 권위는 몰락했다. 사실 청교도 사회의 내핍과 몰락을 재촉한 것은 앤 허친슨과 같은 “주류와는 다른 시각”이 아니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과도한 경직성과 인간의 권력에 신의 권력을 치환하는 독선이었다.     

 

그리고 오늘,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규명 청문회 

 

최근 국정원의 지난 대선 개입과 관련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 자리에 (피고가 아닌)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소신발언이 화제다. 그녀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가 당시 사건을 은폐, 축소하려 했다는 점을 폭로하면서 여당측 인사들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길 바랬죠? (수사때문에 투표할 여력조차 없었다고 말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바랬을 거 아닙니까?” (김태흠 새누리당 의원) 라는 우문까지 등장하는 상황.

 

그 순간. 양심의 영역까지 검증하라고 윽박지르는 권력의 찌질함이 전국민에게 생중계되어버렸고 권 전과장의 상식은 빛이 났다. “지금 의원님께서는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십자가 밟기와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일러두기:  이 칼럼은17세기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벌어진 반율법논쟁 (Antinomian Controversy)에 대한 종교적 혹은 신학적인 관심이나 전문성을 가지고 쓰여진 글이 아님을 미리 밝혀둡니다. 

 

참고자료:

Mark C. Carnes & Michael P. Winship (2004), The Trial of Anne Hutchinson: Liberty, Law, and Intolerance in Puritan New England: Reacting to the Past, Pearson. 

http://en.wikipedia.org/wiki/Anne_Hutchinson

http://www.annehutchinson.com 

미디어몽구, [영상][청문회] 권은희 수사과장의 용기있는 증언 (http://mongu.net/trackback/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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