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의 역사 (2) 1980년대: 보수의 전성시대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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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역사 (2) 1980년대: 보수의 전성시대

 

약 한달 전 치러진 뉴욕시장 선거. 민주당 내에서도 거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았던 진보 성향의 빌 더블라지오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흥미롭게도 더블라지오의 정치적 상품성은 여러 모로 공화당-보수층이 그닥 달가워하지 않거나 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자산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먼저 더블라지오와 함께 당선을 기뻐하고 있는 아들과 딸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을 보면 정치인+정치인 가족 하면 떠오를 법한 전형적인 그림(=중산층 백인 가정)과는 전혀 달라보인다. 언론은 (이태리계 백인인) 더블라지오의 아내 셜레인 매크레이가 흑인이고, 작가이며, 시민운동가이고, 한 때 동성애자였다고 보도했다.

 

누군가는 더블라지오의 아들 단테의 ‘아프로 헤어 스타일(둥글게 부푼 곱슬머리),’ 딸 키아라와 아내의 ‘피어싱’ ‘레게 머리’ 와 같은 스타일에 주목했다. 이들의 스타일은 단지 정치적으로 기획된 코디가 아니라 그들의 일부인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긍정과 자부심이었기에, 유색인종들의 표심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선거기간 더블라지오의 공약 역시 다소 급진적이었던 것같다. 더블라지오는 줄리아니 전 시장과 블룸버그 현 시장의 재임기 동안 뉴욕은 양극화 현상이 심해져, 사실상 두 개의 도시가 되었다고 주장을 하면서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부자 증세를 주장했다. 또 한편 현재 절반 가까운 뉴욕 시민은 빈곤층으로 전락해버렸기때문에, 서민 주택 및 저소득층 교육 공약을 내세웠다.

 

혹자는 더블라지오의 과거 이력에 관심을 가진다. 더블라지오라는 정치인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그가 젊은 시절이었던 80년대에 남미 사회주의 운동에 심취했고 니카라과 민족해방전선인 산디니스타 를 지원했었다는 전력이다. 레이건 행정부 당시 미국은 니카라과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 전선이 권력을 잡자 이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친미성향 반-산디니스타 (혹은 콘트라 Contra)를 불법적으로 지원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참조: 이란-콘트라 스캔들) 더블라지오의 과거 이력은 그를 레이건 (그리고 부시등)이 상징하는 네오콘 세력의 대척점에서 파악하게 해준다.

 

그리고 더 확장해서 더블라지오를 다양성, 계급/계층간 불평등 해소, 복지와 같은 키워드로 이해하려할 때, 그 반대쪽에 위치하는 1980년대 이후의 공화당의 정체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다만 지금 뉴욕에서 지지율 바닥을 맛본 그 공화당의 정체성은 1980년대 상종가의 인기를 구가하던 것이었다.

 

1976년당시 현직이었던 제럴드 포드 대통령 (닉슨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된 후,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수행했다)에게공화당 내 예비 경선에서 패했던, 그리고 이미 고령이었던 레이건은 지지자들의 “내부로부터의, 아래로부터의 보수혁명”1980년 공화당 대선 후보에 지명되면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민주당의 카터와 대결하는 본선에 이른 레이건은 “여러분의 살림살이가 4년 전보다 나아지셨습니까? (Are you better off today than you were four years ago?)”라고 물으면서, “지금은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했고, “작은 정부, 낮은 세금, 자유로운 시장” 을 전면에 내세웠다. 알려져있다시피 결과는 레이건의 대승이었다.

 

1980년 당시 미국은 워터게이트 이후 형성된 공화당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의 ‘무능’에 대한 질타의 분위기가 더욱 강력했었다. 첫째는 오일 파동 이후 타격을 입은 미국 경제의 성장률이 회복되지 않는데도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독특한 경제 상황에 대해 카터 행정부의 대처 능력이 도마위에 올라있었다. 두 번 째로 이란과의 외교 마찰로 인해 1979년 4월 이후 400명에 이르는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인질로 억류되어 있던 상황, 이들의 구출을 위한 특수 군사 작전도 실패하게되면서 카터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도 최악이었다. 즉, 레이건의 선거 슬로건은 정확하게 카터의 실패를 겨냥했다.

 

이 선거는 공화당의 경제 정책의 핵심에 “(기업에 대한) 탈규제, 부유층 및 기업에 대한 세금 감세가 뚜렷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편 1976년 대선 예비경선에서 메디케이드 및 푸드스탬프를 받으면서 공공부조로 호의호식하는 이른바 “웰페어 퀸”을 비판했던 레이건은 대통령 임기중 꾸준히 “복지 지출 축소”를 지향했는데, 이 역시 레이거노믹스의, 그리고 그 이후 30여년 간의 공화당 경제 정책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1980년대 공화당의 인기는 1960년대 말부터 남부로 스며들어 차근히 다져온, 대중적인 것이기도 했다. 1970년대 말부터 <도덕적 다수 Moral Majority>를 위시한 미국 기독교 내부의 보수 단체들은 공화당과 정치적 거리를 좁혔다. <도덕적 다수>는 설립 초창기 교계 내부에서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낙태반대, 학교 내 종교 교육의 부활, 동성애 반대, 가족의 가치 회복 등이 기독교의 가치이자 공화당의 가치로서 표방되면서 공화당의 보수주의는 저변을 더욱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편 레이건에 의해 보수주의는 추락한 미국을 다시 부활시킬 정신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그렇게 공화당이 화려하게 부활한 1980년대는 보수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다음 칼럼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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