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 버 (Aaron Bur)는 왜? (1)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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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버 (Aaron Bur)왜? (1)

 

십 년 전 오늘인 2004년 7월 11일, 뉴저지의 허드슨 강변. 약 1000여명의 구경꾼이 몰려든 가운데,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튼의  5대손인 더글라스 해밀튼과 3대 부통령 아론 버 집안의 후손인 안토니오 버가 이들의 친척 100여명과 함께 노 젓는 배를 타고 등장했다. 19세기 초반의 복식까지 챙겨 입은 두 사내는 공포탄이 장착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서로에게 겨눴다. 잠시 뒤 더글라스 해밀튼이 엉덩이에 총을 맞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연출했다. 200년 전 1804년 7월 11일에 벌어진 알렉산더 해밀튼 (Alexander Hamilton)과 아론 버 (Aaron Burr) 간의 권총 결투를 재연한 행사였다.

 

재연행사는 인근 해밀튼 공원에서 두 집안 사람들이 화해의 포옹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두 세기전 실제 결투는 해밀튼에게 치명상을 입혀 해밀튼이 사망하는 사망의 직접적인 계기였으며, 또한 한때 총명하고 전도 유망했던 법률가이자 정치가로, 일국의 부통령을 지낸 아론 버가 살인자라는, 그리고 다시 몇 년 뒤 반역자라는 꼬리를 떼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비극의 서막이기도 했다.

 

그들은 왜 결투에 이르게된 것일까? 아론 버는 무엇이 부족해서 해밀튼에게 결투를 청하게 된 것이었을까? 그래도 일국의 부통령이라는 사람이? 표면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1800년 선거 이후 아론 버의 해밀튼에 대한 정치적 적대감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1800년 대통령 선거에는 현직 대통령인 연방파 (Federalist Party)의 존 아담스(John Adams), 와 부통령이었던 민주공화파 (Democratic Republican Party)의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뉴욕 기반의 민주공화파였던 아론 버가 후보로 나섰다. 단 세 표 차이로 대통령-부통령의 운명이 갈린 1796년 선거처럼 제퍼슨과 아담스 간의 빅 매치였다. 그러나 1800년 선거 두 후보의 지지자들 간의 흑색 선전과 논쟁은 4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당시의 연방 헌법에 따르면 선거인단의 각 선거인은 두 표씩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 표는 대통령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한표는 부통령을 위해 행사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뚜껑을 열어보니 제퍼슨과 버가 얻은 표는 정확하게 73표씩으로 같았다. 이 경우 두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몫은 아직까지는 ‘연방파가 장악하고 있던’ 하원이었다. 해밀튼을 위시한 연방파 인사들은 결국 아론 버가 아닌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도록 힘을 보탰다.

 

그런데, 해밀튼과 아론 버가 결투에까지 이르게 된 갈등은 1800년 선거보다 훨씬 뿌리가 깊은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그 둘의 정치적 기반이 공통적으로 뉴욕에 있었으며, 매우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들이었다는 것 등 그리고 어딘지 다르면서도 닮았던,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경쟁적일 수 밖에 없었던 아론 버의 유년이 평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장로교 목사이자 프린스턴의 2대 총장을 역임한 아론의 아버지 (Aaron Burr, Sr.)는  아론 버가 태어난 다음 해인 1757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조너썬 에드워드 (Jonathan Edward- ‘진노한 하나님’ 설교로 종교 대각성운동을 끌어냈던 유명한 목사)의 딸로 알려진 그의 어머니 에스더 역시 같은 해에 세상을 등졌다. 아론이 장로교 명망가의 후손으로 유산 덕에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해도, 겨우 두 살의 나이에 고아가 된 셈이다.

 

유년의 굴곡으로 치자면 사실 해밀튼도 만만치 않았다. 아론버가 태어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네비스섬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위그노 교도 출신이었던 어머니 레이첼과 스코트랜드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전남편과 이혼을 할 수 없던 복잡한 법적인 문제로 인해 사생아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사탕수수 대농장과 교역이 활발했던 서인도 제도에서의 어린시절 덕에 해밀튼은 노예제의 잔인함과 유럽 열강들 간의 이해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열 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떠난 후 홀로 형제들을 키우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그 역시 고아로 자랐다. 1772년, 해밀튼은 서인도제도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했다. 가난했지만 총명했던 해밀튼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 해밀튼에게 날개를 달아주기 시작했다.

 

한편, 아론 버는 열 세살의 나이에 프린스턴에 입학, 열 여섯에 대학을 졸업을 할 수 있었던, 총명함을 갖춘 영재였다. 프린스턴대학 총장을 지낸 바 있는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 Woodrow Wilson)은 18세기에 프린스턴을 (아론 버가 다닐 당시의 대학 명은 뉴저지 대학) 졸업한 학생들 중 가장 똑똑한 인재였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미국 휘그당 학회라든가 클리오소픽 소사이어티 (Cliosophic Society of Princeton – 마크 트웨인이라든가 스캇 피츠제럴드 같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배출한 프린스턴 학내 클럽)에 참여했다.  대학 졸업후 신학을 공부했던 아론 버는 열 아홉의 나이에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독립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전쟁이 끝나자 잠시 접어두었던 법률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뉴욕에서 법률가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커리어를 착착 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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