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기만: 퍼거슨 2014, 디트로이트 1967, 그리고 시카고 1919 (1)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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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기만: 퍼거슨 2014, 디트로이트 1967, 그리고 시카고 1919 (1)

 

2014 년, 불타는 퍼거슨 

 

석달 반 전인 지난 8월, 미조리주 퍼거슨시에서 편의점에서 나오던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한 백인 경찰의 총에 맞고 사망했다. <퍼거슨 사태>라고 불리는 대규모 인종 소요의 시작이었다. 

 

사건 초기, 경찰은 비무장 상태의 마이클 브라운에게 총을 겨눈 이유도, 그에게 총을 쏜 경찰의 신원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유족들의 반발을 샀다. 게다가 사건 직전 마이클 브라운이 경찰의 명령에 따라 두 손을 들었는데, 경찰이 여러 발의 총을 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나왔다. 흑인 사회의 전체의 분노가 증폭되었다. TV 화면은 추모집회에서 애도하는 흑인들의 모습과, <손들었어 쏘지 마 Hands Up Don’t Shoot>이라는 팻말을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의 풍경, 약탈의 표적이 된 퍼거슨 시내 곳곳의 상점을 비추고 있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최루탄과 자동 소총을 동원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과잉진압 논란이 불거질 무렵, 미주리 주는 야간 통행금지등을 포함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조리 당국이 부검 결과 사망한 마이클 브라운은 최소 여섯 발 이상의 총알을 맞았다는 사실과 그를 쏜 경찰관은 대런 윌슨이라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마이클 브라운이 편의점에서 50불짜리 시거를 훔쳐 가지고 나온 영상을 함께 공개했다. 여론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퍼거슨의 소요사태는 사건 발생 약 2주 후, 미국 최초의 흑인 법무장관인 에릭 홀더가공정한 재수사를 약속하고나서야 겨우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그 후로 무려 석 달이 흘렀다. 홀더 법무 장관은 사임했다.)

 

며칠 전 11월 24일, 미조리 주 세인트루이스 카운티의 대배심은 마이클 브라운을 총격한 경찰관인 대런 윌슨에게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조사과정에서 목격자들의 진술은 사실 엇갈렸다. 대배심의 판결은 윌슨 경관이 브라운을 체포하면서 브라운이 저항하여 몸싸움이 벌어졌고, 거구인 브라운이 얼굴을 가격하려 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윌슨의 정당방위였으므로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퍼거슨은 지난 8월의 훨씬 더 과격한 소요가 벌어지고 있으며, 미조리주는 주 방위군의 병력을 3배로 증강시켰다고 한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리고 이곳 보스톤을 비롯한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는 저항의 의미로 땅바닥에 드러눕는 다이 인즈 (Die-Ins)  시위가 잇따랐다. 

 

이상 견빙지 (履霜 堅氷至: 서리를 밟게 되면 단단한 얼음이 된다)

 

지금 우리가 현재형으로 목도하고 있는 미조리의 인종소요는 충격적이지만 사실 낯설지 않다. 가령 필자의 세대라면 ‘과속으로 체포된 흑인 로드니킹이 백인 경관 네 명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단초를 제공했었던 92년의 LA 사태의 뉴스 영상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게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퍼거슨 사태나 20여 년 전의 LA 폭동 같은 인종 소요사태는 왜 발생할까? “서리를 밟게 되면 곧 단단한 얼음이 얼게 되는 때가 온다(履霜堅氷至)”는 말이 있다. 여기에는 엄청난 일이 하루 아침에 벌어지지 않는다는 속뜻이 있다고 한다. 실상 인종 폭동과 같은 엄청난 일은 사실 그 도화선이 되는 한 가지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적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크고 작은 분노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폭발함으로써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인종 폭동도 사건들의 타임라인 만으로는 그 원인과 과정을 이해하기도 명쾌하게 설명하기도 힘들 것이다. 다만 과거의 인종 소요 사태의 맥락을 돌아보면, 또렷하지는 않지만 분명 문제적인 장면들이 포착된다. 주민 중 흑인이 압도적 다수임에도 정치 권력과 부는  소수의  백인들에게 집중되어있던 현실과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여전한 사실상 불타는 퍼거슨의 화약고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1967,디트로이트의 롱-핫 서머 

 

어린왕자의 여우가 그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보여지는 현상은 “불타는 도시”이고 “인종 폭동”이지만, 조금만 더 깊숙한 이야기는 인종간의 차별과 장벽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가령 영화 8 Miles에서도 그려진 1967년 미시건 디트로이트 인종 폭동을 예로 들어보자. 그 해 여름 뉴저지 뉴어크에서의 인종폭동에 이어 미시건의 디트로이트에서, 그리고 디트로이트가 뇌관이 되어 다른 미 전역의 여러 대도시에서 인종 소요가 발생했다 (Long Hot Summer). 특히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유혈사태는 3명의 사망, 1189명의 부상이라는 인명 손실과 더불어 총 2000 여채의 건물이 파손되었다.

 

디트로이트 소요는 백인 경찰이 시내의 무허가 술집을 단속하면서 80명에 달하는 흑인 손님 전체를 연행했던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흑인과 백인 간의 그리고 빈곤층과 부유층 간의 장벽이 물리적으로 존재했다. 흑인들이 디트로이트로 이주해오자 도시의 북쪽으로 거주지를 옮긴 부유한 백인들이 1950년, 그들의 거주지와 흑인들의 거주지를 구획하는 도로인 12번가길 위에 (현재의 로자파크스길) 총 8마일에 길이, 2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해버렸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장벽은 실체적이기도 했다. 장벽 남단의 흑인들은 일자리나 복지, 희망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게토”의 거주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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