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기만: 퍼거슨 2014, 디트로이트 1967, 그리고 시카고 1919 (2)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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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기만: 퍼거슨 2014, 디트로이트 1967, 그리고 시카고 1919 (2)

 

(지난 주에 이어) 

 

1967년 디트로이트 사태의 본질적인 원인은 빈곤층과 부유층간의 장벽이면서 동시에 흑인과 백인 간의 장벽이었다. 여기서 잠깐. 디트로이트 사태가 발생했던 1967년은 “흑인 민권운동의 승리”로 기억되는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이 차례로 제정된 <이후>였다는 점도 가벼이 여길 수는 없겠다. 흑인 민권운동은 남부 흑인들에게 정치적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흑백간의 경제적 불평등은 여전했다. 특히 대도시 빈민가의 흑인들에게. 민권운동의 가장 강력한 자원이었던 “비폭력” 저항만으로는 켜켜이 쌓인 차별을 철폐할 수 없다는 인식과 함께, 보다 급진적인 의미에서의 흑인 해방 혹은 흑인 민족주의 등을 주장하는 “블랙파워”운동이 일기도 했던 시기였다. 

 

흑인 민권 운동의 대부인 마틴 루터 킹 목사. 민권법 제정 이후 그는 시카고로 갔다. 경제적 평등은 인종간 평등을 구현하는 또 하나의 선결과제라 여겼기에, 북부에서의 킹 목사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인종간 거주지 분리의 문제였다. 거주지의 차별은 교육과 경제적 기회의 차이로 이어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시카고의 경우,백인들은 도시의 교외 혹은 북부에 거주한다면, 흑인들은 남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식으로 인종간 주거지 분리가 분명했다. 1950년대 이후 백인 인구가 교외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 차원에서 흑백 거주지 분리 정책을 고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까지 했으니.   

 

시카고가 태생부터 흑인들에게 장벽을 쌓은 도시는 아니었을게다. 남부 주들과는 달리, 일리노이에서는 재건시대 이래로 흑인 (남성)들의 참정권이 거부되었던 적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예제 시절보다도 악랄했던 인종차별이 남부 흑인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했던 1880년대 후반 이후로, 흑인들은 진정한 자유를 찾아,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남부를 떠나 산업화된 대도시로 대거 이주했는데, 시카고는 디트로이트, 뉴욕 등과 마찬가지로 흑인들에게 일종의 관문도시 (Gate City)였다. 이렇게 이주한 흑인들은 자유인, 새로운 흑인 (New Negroes)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흑인들의 이동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계 1차 대전시기로, 전쟁 특수로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의 기회가 많은 흑인들을 유입한 대이주 (Great Migration) 현상을 만들었다. 물론 새롭게 이주한 이들 사이에는 참전이나 군수물품 생산이라는 ’애국적인 행위’를 통해 백인과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으려는 노력 혹은 선동도 존재했다. 

 

어쨌거나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전쟁이 끝났다.  1919년 4월에서 11월까지 미국 전역에서 크고 작은 인종간 유혈사태가 약 25건 발생했는데, 그 중 시카고 시내 곳곳에서 약 3박 4일간 벌어졌던 시카고 인종 폭동(Chicago Race Riot, 1919)의 경우, 500 명 이상의 시민들이 부상을 당하고, 23명의 흑인과 15명의 백인이 사망하는 등의 인명 피해와 더불어 1000여 흑인 가정의 거주지가 불타거나 파손 당하는 등 가장 폭력적인 유혈 사태였다. 

 

이 어마어마한 폭력사태의 발단은 외견상 ‘우연’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1919년 7월 27일, 다섯 명의 흑인 청소년들이 미시건 호수로 물놀이를 갔다. 파도타기를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던 이들 중 한 소년, 유진 윌리엄스가 파도에 쓸려 자신도 모른 채 ‘비공식적으로 백인만 노는’ 호숫가  쪽으로 떠밀려갔다. 같은 시간, 일군의 흑인 남녀들이 물놀이를 위해 ‘그’ 호숫가변으로 들어오려다 일군의 백인들에 의해 저지당한다. 두 그룹 사이에 사이에 고성과 삿대질이 오갔다. 감정이 격해졌던 백인 중 누군가가 윌리엄스에게 돌을 던졌다. 이로인해 윌리엄스 군이 익사했다. 

 

그날 오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찰이 달려왔다. 흑인 목격자들이 돌을 던진 사람이 누구인지 지목했지만, 백인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하기를 거부했다. 흑인 군중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그날 밤,  백인 갱단이 흑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사우스 파크 지역을 공격했다. 일명 “블랙 벨트”로 불리는 지역에 집중된 방화와 살상으로 인해, 시카고는 폭력과 혼동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규모 소요는 3-4일 후 잦아들었지만, 크고 작은 무력 사태는 약 2주간 지속되었다. 

 

시카고의 1919년 인종 간 소요 사태는 그 해에 이 도시 저 도시에서 벌어졌던 인종 소요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시카고의 사태가 보다 그 어느 곳보다도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백인 갱단 활동을 주도했던 “Athletic Clubs”는 인종주의 성향이 강한 아이리쉬계 백인 청년들이 주축이었다. 윌슨 행정부의 보고서가 시사하는 대로, 그 소요들의 배경에는 1차 대전과 함께 급증한 흑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과 주거지와 일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백인 갱들이 살상과 방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폭력이 가중되었다. 그런데 흑인들 중에서도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 사는 이들이 가장 집중적인 린치의 대상이되었다. 블랙벨트를 넘어섰다는 것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오늘의 퍼거슨 사태를 돌아보면서, 거의 한 세기가 지나고 제도적 차별이 없어져도 여전히 남아있는 인종간 분리와 차별이 낳은 비극에 대면한다. 인종 사태들은, 어쩌면 게토에서 잠자코 있으라는 기만의 결과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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