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민법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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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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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는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와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이민정책 관련 발언이 위험 수위를 넘어선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를 모두 추방해야한다는 주장에 이어  멕시코 등 “남미 출신 이민자 = 불법 이민자 = 범죄자”로 낙인 찍고, 젭 부시는 “앵커 베이비 = 아시안”이라는 편견을 드러내 보인 것. 

 

공화당이 만들어지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에서 1850년대 중반까지.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북부 도시에 대거 유입되었던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유입에 반대하는 토착주의(nativism)의 목소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비밀결사처럼 활동하면서 누군가 이 단체에 대한 질문을 하면 “I Know Nothing” 이라 답한다 하여 “Know-Nothing Party”로 불리던 이들이 1849년 실제로 “반이민주의”를 거의 유일한 슬로건으로 내세운 미국당(The American Party)을 구성했다. 몇 년 후 공화당으로 유입되긴 했지만. (남부의 경우 이민자의 유입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이민 정서라고 부를 만한 것이 뿌리내리지 않았다고 보는게 좋겠다.)

 

그래도 당시 이들의 저임금 노동은 미국의 빠른 산업화의 숨은 공신이었다. (반-아이리시 정서 뒤에는 낮은 임금으로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이미지도 적지 않았다) 일부는 남북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온갓 멸시와 구박을 받으면서 미국에 정착했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스스로를 정치 세력화 하는 데 상당히 성공했다. 남북 전쟁(1861-1865)이 끝나고 도래한 도금시대(Gilded Age), 미국의 정치는 유력한 정치 보스를 중심으로 정당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명 폴리티컬 머신에 의해 좌우되었는데,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뉴욕 등 대도시 폴리티컬 머신의 핵심으로 성장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1882년 중국인 이민 금지법은 한때 반이민정서의 피해자였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주도했던 반이민정책이었다.) 

 

19세기 후반 남동부 유럽으로부터 대거 유입되었던, 일명  1880년 이후에 생겨난 “새로운 이민의 물결(New Immigrants)” 출신 이민자들도 1920년 무렵 다시 고개를 든 토착주의의 타겟이었다. 1870년 당시 38,500,000명 정도였던 미국 인구는 새로운 이민 물결 덕분에 1900년 76,000,000명으로 증가했다. 대규모 이민의 물결은 불과 30년만에 미국 인구를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시킨 셈이다. 그리고 이들은 대량 생산으로 특징 지어지는 미국의 2차 산업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대량 상산에 필수적이었을 대규모 노동력과 소비 시장의 급성장을 견인했다. 그리고 1910년대까지 남동부 유럽 출신 이민자 그룹은 꾸준히 증가했다. 

 

이들의 이민 행렬에 빨간불이 켜진 것은 1차대전 직후의 일이다. 1차대전 종전 직후인 1919년은 미국 여러 곳에서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는 등 불안정한 해였는데,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목도했던 터, 혹시 미국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적색공포가 자라났다. 적색공포는 249명의 러시안 이민자들을 별다른 근거 없이 본국으로 추방 시키기에 이르른다. 모든 미국적이지 못한 것, 정확히 말해서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가치가 아닌 모든 것이 배척 당하기 시작하는 불관용 시대의 서막이었다. 

 

1920년 치러진 선거에서 하딩은 딱 한마디만 강렬하게 주장했다. “정상으로 돌아가자(returning to the normalcy)” 그리고 당선되었다. 하딩의 당선은 1920년, 24년, 28년 선거에서 연거푸 공화당이 정권을 잡게 되는 시작점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하게는 약 20년 간 진행되었던 혁신주의가 막을 내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시오도어 루즈벨트(공화당, 재임: 1901~1909)에서 윌슨(민주당, 재임: 1913~1921)에 이르기까지 산업 자본에게 부가 편중되는 도금시대의 부작용을 줄이고 산업화 및 대량 이민으로 발생한 도시 문제 등을 바로 잡아야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연방 소득세의 부과(수정헌법 16조), 반독점법의 강화(가령 Clayton Antitrust Act), 관세 인하(Underwood Tariff, 1913) 등이 그 성과였을 것이다. 

 

정상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하딩의 재임기, 낙수효과 이론(Trickle-down)을 주장하는 앤드류 멜론 재무장관은 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감세 정책을 펼치는 한편 미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인상했다. Underwood Tariff 하에서 27% 가량이었던 관세는 1922년, 23년의 Fordney-McCumber Tariff의 단행으로 최고 36.3%까지 오르게 된다. 반독점법으로 규제 받는 기업은 없었다. 

 

그 하딩의 재임기에 통과한 법 중 중요한 한 가지가 1921년의 이민법이다. National Origins Act 혹은 Emergent Quota Act라고 불리는 이 법은 1910년의 인구 센서스를 기준으로 기존 이민자 대비 3% 이내로 이민을 억제하는 법이었다. 3년 후인 1924년 이민법은 3%의 쿼터를 2%로 낮추고 기준이 되는 센서스를 1890년 센서스로 바꾸는데, 사실상 이 이민법들의 타겟이 19세기 후반부터 급증한 남동부 유럽 이민자였던 탓이다. 그리고 실제로 1920년대의 이민법 덕에 이 지역으로부터의 이민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하딩의 당선으로부터 10년이 채 되지 않은 1929년 가을 뉴욕의 주식시장이 갑자기 붕괴했다. 미국은 대공황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주식시장 붕괴가 대공황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대공황이 주식시장의 붕괴로 드러났다고 해야 옳다. 그로부터 미국을 10년 가까이 괴롭힌 공황의 장기적인 요인은 다양하다. 가령 1920년대의 친재벌 정책으로 서민들은 소비의 여력을 상실했던 데다가, 급감한 이민으로 인해 “과잉 생산”이 발생했던 것. 요즘 공화당 후보들의 반이민 논쟁을 보다가 1920년대가 생각났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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