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 (1)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이 묵인한 폭력을 기억하라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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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 (1)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이 묵인한 폭력을 기억하라

 

86838.jpg세계 제 2차 대전 개전이 다가오고 있던, 1938년 11월 9일 밤. 독일 전역에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한 대규모의, 고도로 조직화된 폭력이 자행되었다. 청년 나찌들이 총 250개가 넘는 시나고그 (유대교 회당)을 파괴하거나 불태웠고, 유대인 가정집들을 약탈했다. 그날 밤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된 숱한 유대인들 중 수 십 명은 사망했다. 이들은 유대인 상점도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이 약탈과 파괴, 방화의 대상이 되었다. 그날 밤 나찌 대원들의 광기 속에 처참하게 산산조각 난 상점의 유리의 파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수정처럼 반짝였다. 수정의 밤, 혹은 깨진 유리의 밤이라고 부르는 크리스탈나흐트 (Kristallnacht) 사건이며, 2차대전 기간 나찌의 홀로코스트의 전주곡이다. 

 

크리스탈나흐트는 표면상 사건 3일전인 11월 6일, 프랑스에 거주하던 한 유대인 청소년이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 공무원 에른스트 폰 라트를 권총으로 테러한 데에 대한 독일 시민들(이라고 쓰고 나찌 돌격대라고 읽다)의 “집단적이고 자발적인” 응징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자발적 폭력 행사는 사실 나찌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기획된 성질이기도 했다. 총격을 받은 에른스트 폰 라트가 이틀 뒤 사망하자, 당시 나치의 선전부장이었던 괴벨스는 잽싸게, 그리고 영리하게, “유대인들도 독일인들의 분노를 느껴야할 때”라는 식으로 이 사건을 나찌의 반유대주의 선동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괴벨스의 선동 속에는, 어린 소년이 권총을 집어들게 만든 나찌의 유대인 탄압이나 부당한 강제 이주 정책은 생략되어 있었다. 대신에 유대인 전체가 독일의 외부이자 악마와 동일시되었고, 역으로 반유대 정서와 행동은 모국 독일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의 증명 등과 동일시되었다. 1938년 11월 9일의 집단적인 “반유대 행동”은 그렇게 조직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비-유대계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대상으로한 광기에 가까운 폭력에 직접 행동대원으로 동참하지는 않았을 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직접 나찌 돌격대로서 크리스탈나흐트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 시민들이 크리스탈나흐트의 참담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의 반응이다. 많은 비유대계 독일인들이 “저들은 유대인이니까, 그리고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제거되어야하니까”라는 식으로 이미 벌어진 집단 폭력에 대해 나름의 합리화를 해버리곤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유럽에서의 반유대정서는 2차 대전 발발 무렵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물론 아니다. 유럽 전체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생겨난, 예수를 못박은 민족이라는 낙인과 증오의 효과일 수도 있겠지만,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이산자(Diaspora)의 위치에서도 유대교 전통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하던 탓에 사회적, 정치적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탓도 있다. 카톨릭은 타부시하는 대부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덕에 상당한 부를 갖춘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이 때문에 유대인 전체에게 탐욕이라는 편견을 덧씌우기도 했다. 중세 유럽의 유대인들은 게토 (Ghetto)에 격리되어 거주해야 했다. 때때로 대량 학살이나 린치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찌의 유대인 박해 역시 유럽에 뿌리박힌 반유대정서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나찌는 유대인이라는 타자를 설정함으로써 독일 내부의 불만과 문제를 외부로 전가하고, 비유대 독일인들을 나찌의 선동 아래 결속시켰다. 희생양을 의미하는 scapegoat는 고대의 제사에서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댓가의 제물로 양이 바쳐졌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희생양”은 여전히 존재한다. 즉, 정부가 가상의 적을 설정하여 국가 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내부’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나찌가 그랬다. 

 

1930년대 독일은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바로 이무렵 정치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히틀러는 독일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과 영광을 되살려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독일 경제의 문제를 독일 내에 존재하는 다른 민족, 유대인들에게 전가했다. 나찌가 만들어내는 게르만에 대한,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민족적, 인종적 편견이 강해질 수록, 설령 그것이 허상이라 할지라도, 나찌는 강해졌다. 게르만족이 유대인에 의해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 청소”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정책이 서서히 사람들의 의식을 잠식했다. 

 

크리스탈 나흐트를 목격하던 많은 비유대계 독일인들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유대인들 수십만 명을 추방한) 덕분에 높은 실업 문제가 해결이 되었고, 히틀러가 독일의 ‘자부심’을 다시 일깨워 주었고…”하는 식의 합리화로 사건을 회피했다. 나찌의 반유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비애국적인 행위로 매도되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육을 국정교과서 체제로 회귀하려는 한국 정부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위해서 국정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올바른’이라는 가치 판단은 누구의 이해와 시각을 대변하고 있는 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나찌도 그랬다. 무고한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면서도, 독일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명분을 갖다 붙였다. 타자에 대한 억압에 의해 이루어질 독일의 영광은 그 자체로 올바르다는 생각, 그 무서운 독단이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내 나라, 내 모국을 자랑스러워 하고 싶다. 그래서 그 나라는 제발이지 올바른 것은 한 가지라도 주장하여 북한의 일당 독재나 나찌즘을 벤치마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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