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오염, 몸의 기억: 베트남전의 에이전트 오렌지

by help posted Jun 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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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오염, 몸의 기억: 베트남전의 에이전트 오렌지

 

retro-agent-orange-videoSixteenByNine1050.jpg1961년 5월, 아시아 순방 중이던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부통령이 공산주의자 호치민(Ho Chi Minh)이 이끄는 북베트남과 전쟁 중이던 남베트남에 방문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고 딘 디엠(Ngo Dinh Diem)을 만난 존슨은 디엠을 "아시아의 처칠"이라고 추켜세웠고. 디엠은 미국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순방에서 돌아온 존슨은 베트남이 호치민에 의해 공산화될 경우 그 여파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등 인접 국가의 공산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을 설파하고 다녔다.

 

1954년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소비에트 연방이 참여한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베트남의 분단 종식과 평화를 위해 1956년 전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투표를 실시했어야 했다. 북베트남 베트 민(Viet Minh)의 지도자 호치민이 선거에서 이길 경우 베트남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은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남베트남의 단독 정부 (베트남 공화국) 수립을 지원했다. 이때 베트남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 바로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디엠이다.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와 군사적 '조언'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베트남전은 일차적으로 내전이었겠지만, 소비에트와 중국의 공산주의 세력과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세력 사이의 대리전 성격이 강했다. 그렇기에 냉전 시기의 미국은 베트남전을 공산주의를 상대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일종의 성전(聖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미국이 베트남과 관련해서는 여러가지로 잘못된 판단을 내렸더랬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미국이 1950년대 중반부터 지원했던 디엠 정권의 문제점이었다. 디엠 정권의 부패가 극심했던 데다가, 친족 등용, 불교 탄압, 토지 개혁 실패, 친서방 정책 등으로 남베트남 일반 민중들의 지지를 잃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디엠의 정권에 반대하는 반정부 투쟁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1960년, 디엠의 친미정권을 전복시키고 베트남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자들 및 공산주의 동조 세력이 남베트남 내에 민족해방전선(NLF: National Liberation Front, 일명 베트콩 Vietcong) 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부 베트남에서는 정규군인 북베트남군과 남부 베트남에서는 게릴라군인 베트콩과 전투를 치러야했다.

 

1963년 독재자였던 디엠이 암살당했다. 그러나 NLF의 목적대로 통일 정부가 수립되지는 못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하자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이듬해 (이후에 조작된 것으로 알려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제한적 역할'은 '적극적 개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965년부터 미국으로부터 대규모의 병력과 자원이 투입된 베트남의 내전은 미국과 북베트남 간의 베트남전으로 확전하였다. 


1965년 184,000명, 1966년 385,000명, 1967년 485,000명, 1968년 538,000명으로 미군이 파병한 지상군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이 오랜 식민지 시절을 겪은 베트남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 데에는 (그리고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미국이 병력을 증강하는 만큼, 베트콩으로서 싸우는 군인의 숫자도 늘었고,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으로부터의 군사 원조도 증가했던 까닭이다.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존재는 베트남 내에서의 반미감정만을 더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에 '기여'했다.

 

두 번째는 미국 입장에서 '게릴라'와 민간인을 구분하기 어려웠던 점. 결국은 'Hey Hey LBJ How many kids did you kill today'의 노랫말이 보여주듯, 혹은 미라이 마을을 비롯한 양민 학살 사건들이 보여주듯, 미국은 비도덕적인 전쟁을 치른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학살. 베트남의 우거진 밀림 때문에 그 속에서 작전 중인 남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 게릴라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미군은 게릴라들이 점령한 베트남의 밀림을 고사시키기 위한 작전(Operation Ranch Hand)의 일환으로 고엽제(herbicide)를 사용했다. 미군이 고엽제를 사용한 또 다른 이유는 베트콩의 농업 지역을 황폐화시킴으로써 북베트남군과 NFL 게릴라들에 대한 식량 공급 경로를 차단시키고자 함이었다.

 

미군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약 2000만 갤론의 고엽제를 베트남과 인접 국가에 살포했다. 그 중 60%가 바로 오늘날 GMO 종자 시장과 화학적 제초제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 몬산토가 생산했던 에이전트 오렌지였다. (에이전트 오렌지의 이름은 고엽제를 담은 갤런 통의 색깔에 따라 붙여졌다) 문제는 고엽제의 성분이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2,4-D라는 성분과 2,4,5-T라는 성분이 반반씩 섞인 제초제인데, 이 중 2,4,5-T를 합성할 때 TCD 다이옥신이 부산물로 나오게 된다. TCD 다이옥신은 발암 물질이며, 내분비계를 교란시킬 수 있는 물질이다. 또한 기형을 유발할 수도 있다.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미국은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의 출구 전략을 모색했다. 하지만 에이전트 오렌지가, 그리고 다른 고엽제가 살포되고 있는 동안 베트남에서는 수십만의 아이들이 기형으로 태어났고, 고엽제 살포에 관여했던 미군들과 한국군들도 건강 상에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더 가슴 아픈 일은 그 피해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 물론 몬산토 등은 에이전트 오렌지가 피해자들에게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일으켰다는 인과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학 물질로 인한 오염과 그 피해를, 사람들의 몸은 기억하고, 또 그 다음 세대의 몸이 기억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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