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호, 천안함, 그리고 국가의 거짓말

by help posted Feb 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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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호, 천안함, 그리고 국가의 거짓말

 

“전직” 팍스 뉴스 워치 Fox News Watch의 진행자였으나, 현재는 언론비평가 및 저널리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에릭 번즈의 책 All the News Unfit to Print: How Things Were... and How They Were Reported (Wiley, 2009)이 최근 한글로 번역되었다. <메인호를 기억하라: 허위의 시대 언론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을 달고. 원서와 한글 번역본의 제목이 암시하듯, 미국사에 얽혀있는 언론의 날조와 선동을 파헤치고 있는 이 흥미로운 책 중에 절대 사소한 에피소드로 치부하고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은 미국-스페인 전쟁을 “촉발”시킨 메인호 폭발 사건 (8장, Furnishing a War)인 듯 싶다.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898년까지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9세기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쿠바 독립 운동은 번번이 실패했었지만, 1895년 호세 마르티가 이끈 쿠바 혁명당이 2차 독립전쟁을 일으키면서 독립을 향한 쿠바인들의 열망은 다시 타올랐다. 당연 스페인의 탄압도 그 강도를 더해가면서, 주변국인 미국이 쿠바에 개입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결국 1898년 미국 정부는 “쿠바에 있는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쿠바의 아바나항에 군함인 메인호를 파견하고, 스페인을 견제하기로 한다. 

당시 한편으로는 영토확장을 통해 미국의 자유와 이상을 확산시키는 것이야말로 신이 미국에 부여한 “명백한 운명 (Manifest Destiny)”이라는 19세기 미국식 팽창주의 정서도 팽배했다고 한다. 자본은 매력적인 해외 시장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않았고, 종교계는 쿠바를 새로운 개종의 대상으로 보았다. 

어쨌거나 아바나항에 정박중이던 메인호는 1898년 2월, 갑자기 발생한 원인불명의 폭발로 한 순간 침몰해버렸다. 배에 승선하고 있던 268명의 목숨도 함께 사라졌다. 스페인과 쿠바측은 이 사건에 대한 공동조사를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한 미국은 스페인측이 일으킨 기뢰에 의한 테러행위로 자체적으로 결론지었다. 곧이어 뉴욕저널의 히어스트는 “메인호를 기억하라, 스페인에게 저주를”이라고 보복과 응징, 전쟁의 불가피성을 선동하였다. 히어스트는 스페인군의 잔혹행위를 담은 거짓기사를 연일 선정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는데, 당시 언론계의 라이벌이었던 퓰리쳐가 이끄는 월드지를 넘어서려는 욕심도 이런 날조를 부추기는 한 원인이었다는 대목도 놀랍다. (어쨌거나 후에 히어스트는 황색 저널리즘의 창시자라는 닉네임을 얻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당시 독자적으로 사건을 조사한 스페인측은 사고가 탄약고 옆에 위치해있던 석탄 저장고에서 발생한 자연발화에 의한 내부적 폭발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 주장했었다. 미국측의 주장대로 기뢰 폭발이라면 나타났어야 할 물기둥이나 죽은 물고기 떼 등이 관측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했으나 당시 미국 언론에 이 같은 내용이 회자되지는 않았다. 

황색언론의 선동은 이제 애국의 이름으로 포장되었고, 애국심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국가의 이름으로. 메인호 사건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메인호 사건을 도화선으로 (혹은 빌미로) 이내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석달여만에 가볍게 끝이 났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 미국은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을 영토화했고 쿠바에 대한 배타적인 영향력을 얻었으며, 사실상 전세계에 대한 실질적인 패권을 획득할수 있었다.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권한에 일본이 눈감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를 미국이 눈감기로하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도 이 전쟁의 한 귀결이었다!) 오죽하면 혹자는 이 전쟁을 “눈부신 작은 전쟁”이라 별명을 지었겠는가. 그렇지만 그 눈부신 승리는 정당한것이었을까? 

여러 차례 재조사가 이루어졌음에도 메인호 사건의 원인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대체로 애초에 스페인측이 주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체폭발”이라는 결론에 힘이 실렸었으나, 일각에서는 자체폭발도 여전히 증거능력이 불충분하다며 기뢰의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기뢰에 의한 폭발을 주장하는 측에서조차 스페인의 개입이라는 아무런 단서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조작설의 “누명”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모 신문을 보다가 “당신들은 한국인이면서 왜 정부 발표를 못 믿나”라는 기사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천안함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결론 낸 합동 조사단이 제시한 “증거”들이 과학적으로 불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해온 재미 과학자들이 초청된 일본의 어느 기자 간담회를 보도한 것이었다.

 

사실 제목은 그 신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압축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불충분한 증거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건강한 회의마저 좌빨과 친북으로 색칠하고 배척하려 한다면, 설령 북한이 천안함 사건의 장본인이라 한들 수긍할만한 “과학적” 증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오히려 백 년 후에도 미제의 사건으로 남아 “당시 정부의 자작극은 아니었을까”하는 의혹의 뿌리만 더 깊게 남기게 되지 않겠는가.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과학이다. 과학의 미덕은 합리적 의심이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한국의 언론 보도는 히어스트가 광기 어린 애국심을 조장하고 전쟁을 선동했던 한 세기 전 미국황색 저널리즘에서 얼마나 더 진보했을까, 되짚어볼 일이다. 

• 미-스페인 전쟁과는 관련이 없지만 에릭 번즈 Eric Burns 의 저서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두권의 책으로 The Smoke of the Gods: A Social History of Tobacco (담배의 사회사)와 Spirits Of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lcohol (알콜의 사회사)가 재미있다. 
• 초등학생 자녀가 읽을만한 미-스페인 전쟁에 관한 책으로는 Edward Dolan의 The Spanish-American War를 추천한다. 

명백한 운명 (Manifest destiny)
미개척지를 개척하여 문명화하고 자유와 같은 미국적 가치를 이식하는 것이 신이 미합중국에 부여한 명백한 사명이라는 19세기의 믿음. Manifest destiny는 1845년 저널리스트 John L. O’Sullivan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