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드 니 대학살, 서부 개척 시대의 종언

by help posted Feb 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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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니 대학살, 서부 개척 시대의 종언

 

“코자크씨에게. 우리 추장들은 백인에 대한 소망이 있다. 우리 홍인 (redman)도 백인처럼 위대한 영웅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면 한다. 우리의 영웅은 성난 말(Crazy Horse)이다.” - 1939년 수우 Sioux 족의 추장 서있는 곰 (Standing Bear)이 조각가 코자크 지오코브스키에게 보낸 편지, EBS 지식채널 e, Crazy Horse 편에서 발췌.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농장을 짓고 ?


남북전쟁 중이던 1862년 5월 20일, 링컨 대통령은 자영농지법(Homestead Act of 1862)을 승인한다. 미시시피 강 서부로의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 제안된 자영농지법의 내용은 21세 이상의 미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단돈 10달러의 등록 수수료를 내고 5년의 거주 조건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160에이커의 미개척 땅에 대한 소유권을 무상으로 불허받게 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의 법안이었다. 이미 1850년 경, 19세기 전반부의 영토 팽창에 이어 새롭게 획득한 연방 정부의 땅에 대한 공유지 개념이 싹트면서 서부 지역의 토지에 대한 무상분배 논의가 이미 무르익었었다. 그러나 이전 개척민들과의 형평성 문제, 북부의 부동산 값 하락과 노동력 부족을 우려한 북부의 입장, 서부 영토에 “자유주 (노예제 반대 주)”의 숫자가 증가할 것을 우려한 남부의 입장등이 맞물리면서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던 이 법안이, 서부에서의 정치적 지지를 노린 링컨대통령에 의해 통과된 것이었다. 

물론 이 법안에 힘 입어 서부로 이주한 자작농들이 대개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이들에게 중서부의 대평원 지역은 불모지이자 서부로 가는 길목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극심한 일교차와 잦은 토네이도, 고립감, 수자원 부족, 곡물가격의 잦은 변동, 메뚜기떼와 같은 해충의 습격같은 문제들이 자작농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가로막곤 했다. 또한 자영농지법을 악용하는 투기세력도 들끓었다. 소규모 자작농들은 서부 횡단 철도 사업을 주도하던 철도 재벌이나 부유한 목축업자들에게 다시 헐값에 땅을 넘겨주곤 했다. 어쨌거나 척박한 땅을 개간하기 위한 새로운 농업기술이 속속 도입되고, 이 지역에 적합한 작물들을 특화한 “미국식 대규모 농장”과 소를 방목하는 대규모 목장들이 들어섰다. (아마 카우보이가 서부개척시대의 한 아이콘이 된 이유겠다)

“서부 개척”은 버펄로라는 생물종의 몰락사이기도하다. 대륙 횡단 철도가 놓여지고, 새롭게 놓여진 철도가 분주하게 이주민과 군대를 실어나르고, 버펄로 대신 소떼가 대평원을 채워가기 시작하던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평원의 버펄로는 거의 멸종 위기에 처했다. 별미로 알려진 버펄로 고기의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혹은 늘어난 쇠고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목장을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수의 버펄로가 사냥되었다. 백인 인구가 유입된 지 불과 2년만에 355만마리의 버펄로가 사냥되었다고 하니, 대평원은 버펄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킬링 필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들”의 프론티어정신에 문화와 삶이 파괴된 사람들 


서부개척의 가장큰 피해자는 대평원과 현재의 아리조나 및 뉴 멕시코 사막지대에 거주하던 “평야의 인디언 부족들 (Plains people. 코만치, 수우, 포니, 블랙풋, 크로우족, 아파치족, 푸에블로족 등)”이다. 이들은 대개 반정착 유목민들로서 말을 타고 대평원을 누비며 버펄로 사냥 기반으로 생활했었다. 뒤집어말하면 서부개척과 함께 단시간 동안 이루어진 버펄로의 멸종이 평야의 인디언들의 경제 활동에 끼친 영향은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피해는 “땅”을 둘러싼 충돌때문이었다. 1866년부터 1891년까지 연방군은 인디언 부족과의 크고작은 전투에 엄청난 병력과 비용을 지불했다. 연방 정부의 적극적인 서부 개척 정책은 정책 인디언들을 제한된 경계구역으로 몰아넣고자했고, 이에 반발할 수 밖에 없는 인디언 부족들과 연방 군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물론 군사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연방 군대와의 군사적 충돌에서 인디언 부족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1891년 12월 29일, 운디드 니에서 벌어진 수우족과 연방군의 전투가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200여명의 수우족이 전멸되는 “대학살”로 마무리되면서 서부의 식민지화는 “공식적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패했다고 해서, 인디언들은 그저 “무력한 희생자”로 남아야할까? “자기가 걸어다니는 땅을 팔아먹는 자는 없다”라는 말로 백인들의 땅에 대한 요구를 묵살하고, 리틀 빅혼에서의 전투를 완벽한 승리로 이끌었던 수우족의 지도자 성난 말 (크레이지 호스)을 그들의 영웅으로 기억하고자 “코자크씨”에게 편지를 썼던 인디언들이 원하는 것은 동정이 아니라 진실일 것 같다. 워싱턴과 제퍼슨, 링컨 같은 미국의 영웅들이 새겨진 사우스 다코타의 러시모어산에서 불과 27km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성난 말”이 이 땅을 지켜보고 있다. 러시모어산을 조각했던 코자크씨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