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로 향한 길목에서 곱씹다, 그녀들의 빵과 장미

by help posted Feb 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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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로 향한 길목에서 곱씹다, 그녀들의 빵과 장미

 

“여성들도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동일한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정당과 공공기관에 들어가기 위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sexuality)과 수태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어느 여성 노동자가 남긴 연설 중)

성 패트릭 데이

 

몇 주 후면 성 패트릭 데이 (St. Patrick’s Day)라고 벌써부터 모자도, 가방도, 카드도 온통 초록색 토끼풀로 앙증맞게 장식한 상점들이 벌써부터 종종 눈에 뜨인다. 머지 않아 녹색의 토끼풀 (샴록) 모양과 함께 ‘Happy St. Patrick's Day’라고 쓴 리스를 집에 걸어둔 집을 심심찮게 볼 수 있겠구나. 뉴욕과 보스턴 시내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녹색으로 꾸민 사람들이 퍼레이드를 벌이겠구나. 그날 하루 초록색 맥주잔에 따른 기네스도 미친듯이 팔리겠구나. 계절은 그렇게 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보스톤에 오기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날에 근접해있던 성 패트릭 데이인데, 이곳 보스톤 (그리고 뉴욕)에서만큼은 유독 유쾌하고 왁자지껄하게 지켜지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들 지역의 성패트릭 데이는 유독 다른 곳보다 거하게 즐겨지는 것일까?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아일랜드의 국왕이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입지전적으로 선교를 했던 인물로, 뉴욕 5번가에 있는 성 패트릭 성당이 바로 이 패트릭을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토끼풀이 아일랜드의 상징이 된 것도, 패트릭이 세잎의 토끼풀을 가지고 삼위일체설을 설명했기 때문이라는, 나름 신빙성 있는 해석도 있다. 3월 17일은 바로 그 성 패트릭이 사망한 날로 아일랜드 본토에서는 나름 경건한 날로 지켜진다. 엄밀히 말하면 “다른 나라”의 “종교적 명절” 인 셈. 

아일랜드 이민자들 


아일랜드의 명절이 뉴욕이나 보스톤에서만큼은 떠들썩한 축제로 지켜지는 이유는 이곳 동부의 대도시에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유독 많이 정착했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 정치하면 떠올리는 케네디 가문이나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출신 존 케리도 거슬러 올라가면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 그러면 왜 케네디의 조상이나 케리의 조상은 다른 곳이 아니라 뉴욕과 보스톤에 정착했을까? 

1860년에서 1890년까지의 기간 동안 아일랜드, 독일,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약 천 만명의 이민자들이 미국 본토로 유입되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이탈리와 그리스 출신 이민자가 주를 이루게 된다)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 온 독일계 이민자들은 주로 남성, 혹은 가족단위 이민자 집단이었다. 이들은 서부로 정착하여 농장을 사들이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등, 전반적으로 미국사회에서 환영을 받았다(물론,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당시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러나 같은 시기 미국에 이주한 “아이리쉬”들은 독일계 이민자들과 여러 모로 달랐다. 거의 무일푼상태로 건너온 이들은 저임금, 비숙련 노동의 일자리를 구할 확률이 높은 대도시에 터를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비숙련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종사하던 방직, 섬유 산업의 성장은 이들 아일랜드계 이민여성들의 노동이 절대적이었다. 뉴욕이나 보스톤에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많은 까닭이다. 

이들은 당시 여러 모로 미국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개신교가 지배적인 미국사회에서 “카톨릭을 믿는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러했고, 도시 빈민에 대한 사회의 낙인도 있었다. 심지어 노동조합들조차도 “남성-미국인-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존재들을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오죽하면 이들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하얀 검둥이 (White Negro)”라고 불렸겠는가. 

그녀들의 빵과 장미 


1900년에서 1920년 무렵까지, 백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부패나 비효율, 비위생적인 도시환경 등을 개혁하자는 개혁주의 (Progressivism)의 물결이 일었었다. 개혁주의의 여러 스펙트럼 내에서도 특히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운동은 규모와 성과 면에서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참정권 같은 여성들의 정치적 권리 향상 혹은 사회의 개혁을 단지 중산층 엘리트들만이 요구해서 얻어진 성과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1908년 3월 8일 뉴욕의 럿거스 광장에 15000명이 넘는 방직 산업 여성 노동자들이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노동에 대해 동일한 혹은 생존을 위해 적정한 임금 (‘빵’)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투표할 권리라는 ‘장미’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녀들에게 참정권이란 빵과 장미에 대한 일종의 선결조건이었던 것. 현재 3월 8일에 기념하는 세계 여성의 날의 시초다. 오늘 내가 누리는 빵과 장미의 적어도 일부는 럿거스 광장에 뛰쳐나온 “그” 비정규직 이민자 여성들에게 빚 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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