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젠버그 부부는 죽음의 교도소에서 무엇을 보았나 (1)

by help posted Feb 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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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젠버그 부부는 죽음의 교도소에서 무엇을 보았나 (1)

 

“이번 사형 선고는 놀랍지 않습니다. 사형선고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인들이 한국 전쟁을 납득할 수 있으려면 미국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집단적 공포는 더욱 강렬해야 했기에, 로젠버그 사건은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줄리어스 로젠버그, 변호사 매니 블로흐에게 보낸 편지 중)

1950년 7월 17일, 면도중이던 전기 기술자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FBI에 의해 긴급 체포된다. 원자폭탄 제조 기술의 비밀을 소비에트 연방에 넘긴 간첩 혐의였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FBI는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아내 에설을 줄리어스의 간첩 행위를 도왔다는 명목으로 체포했다. 

사실 로젠버그 부부의 체포는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스파이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이 시작되었다. 50년 1월, 원자 폭탄 개발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영국의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가 본인의 스파이 행위를 시인함과 동시에 “레이몬드”라는 인물이 자신을 리크루트했다고 자백했다. FBI는 대대적인 색출 작전을 끝에, 자칭 전직 공산주의자들로부터의 자백과 고발을 얻어낸다. 같은 해 6월, FBI는 로스알라모스의 원자폭탄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를 체포하고, 그로부터 그의 매형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종용에 의해 원자 폭탄 개발 관련된 (조잡한) 스케치를 넘겼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이제 스파이 고리의 정점이 된 로젠버그 부부. FBI 국장 애드거 후버는 로젠버그 부부의 간첩행위가 “세기의 범죄”라고 이야기했다. 이들의 재판을 담당한 어빙 코프만 판사는 판결문에서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폭탄 비밀을 소련에 넘김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그로 인해 숱한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이들은 “살인보다 더한 범죄”를 저지른 셈이라고 맹비난했다. 

로젠버그 부부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다. 피고들의 항소는 기각 되었고,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14 주년 결혼기념일이었던 1953년 6월 19일, 부부는 전기 충격의자에서 나란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일명 로젠버그 재판은 미국 역사상 민간인이 간첩행위로 사형 당한 케이스로는 최초이자 아마 유일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반세기 넘는 현재까지 숱한 해석과 논란을 가져온 사건이기도 하다.

로젠버그 사건을 둘러싼 가장 주된 논란거리는 이들이 정말로 스파이였는지, 아니면 매카시 광풍이 몰아치던 시대의 희생양이었는지를 둘러싼 것이었다. 재판이 이루어지던 당시, 로젠버그 부부의 스파이행위에 대한 물증은 빈약하기 그지 없었고, 공소장은 원자폭탄 제조 기밀 유출이 아니라 “간첩 행위 공모”를 문제 삼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공개된 증거들은 주로 줄리어스가 소련에 대해 일종의 스파이 행위를 했던 것은 사실이라는 결론을 지지한다. 그런데 그가 빼돌렸다는 정보는 원자폭탄의 핵심 기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여진다. 에설의 경우는 무고했던 듯하다. 푹스나 그랜글래스가 10년, 15년 형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설령 이들이 깊숙히 스파이 행위에 관련되어 있다한들 사형이라는 판결은 “너무 과했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그때문에 <인저스티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와 같은 저서들은 로젠버그 재판을 사코와 반제티 사건이나 드레퓌스 사건 처럼 불합리하고 공정성을 결여한 재판의 한 예로서 빼놓지 않고 소개하곤 한다. 다만, 최근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대학 동기로 로젠버그 재판의 또다른 인물이었던 머튼 소벨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실제로 스파이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고백하자 몇몇 언론들은 “로젠버그는 실제로 스파이였다!”는 식으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로젠버그 부부가 냉전의 희생양이었다는 시각은 다소 희석된 듯 하다.

어쨌거나 로젠버그 사건은 매우 잘 알려져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교과서에서 앨저 히스 사건, 할리우드 10인 사건 등과 함께 냉전, 매카시즘의 징후로서 건조하게 기억했던 단 한 줄짜리 로젠버그 사건에, 조금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로젠버그가 실제로 간첩이었는지의 여부보다, 그 사건 뒤의 “가족”과 관련된 궁금증에서 시작했었다. 

무엇보다도 부부에게는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로젠버그 부부에 대해 미국 사법 당국은 “자백”을 강요하며, 부부가 사형당할 경우 고아가 될 아들들을 생각치 않는 매정한 부모라 조롱했다. 그들은 정말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때문에 자식들도 저버릴 수 있었던 걸까? 

한편, 에셀의 친남동생인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재판 당시 그의 증언과 시인이 로젠버그 부부의 간첩행위에 대한 가장 유력한 증거로서 채택되었었다. 그는 왜 친누이와 매형을 간첩으로 고발했던 것일까?

2001년, 신분을 세탁하고 은신하며 지내던 그린글래스는 50년 당시 법정에서의 증언이 로젠버그 부부 체포에 앞서 원자폭탄 기밀 스파이 “혐의”에 연루되었던 자신의 형량을 낮추고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플리바게닝이었음을 시인했다 (당사자가 입을 연 것은 60년만이었지만, 이는 오랫동안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정황상 에설은 줄리어스의 (허위)자백을 위한 수단으로 기소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아마 이들도 제 3의 스파이 행위자 이름을 사법당국에 건넸더라면 사형은 모면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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