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별이 오래도록 반짝일 수 밖에 없는 이유

by help posted Feb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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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이 오래도록 반짝일 수 밖에 없는 이유

 

1931년 미국 국가로 제정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성조기여 영원하라 Star-Spangled Banner >의 노랫말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814년 9월 13일에 탄생했다.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시인이었던 프랜시스 스캇 키 (Francis Scott Key, 1779 ~ 1843)가 영국과의 전쟁 중에 지은 시 <맥헨리 요새의 방어 (Defence of Fort McHenry)>가 <성조기여 영원하라>의 노랫말이 되었다. 

1781년 버지니아주의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의 콘월리스가 항복하면서 독립 전쟁의 주요 전투는 끝이 났고, 영국과 미국이 파리조약에 조인한 1783년 공식적으로도 독립전쟁은 끝이 났다. “영국과의 전쟁”이라는 정보에 간혹 독립전쟁으로 오인하기도 하는데, 키가 <맥헨리 요새의 방어>를 작시했던 배경이 되는 전쟁은 독립전쟁이 아니라 1812년 전쟁(1812~1814) 이다. 

역사에서는 숱한 전쟁들을 전쟁이 발발한 맥락과, 전쟁이 끝나게 된 계기들, 그리고 그것의 귀결 같은 문제들을 중심으로 이해하게 마련이다. 1812년 전쟁 역시 초창기 미국의 정치 역학, 당시의 국제 정세, 인디언 정책, 미국 국민주의의 탄생, 더 나아가서는 경제적 부흥과 팽창주의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상당히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준다. 

<맥헨리 요새의 방어>가 작시된 지 200주년 “쯤”을 기념해 이번 칼럼은 1812년 전쟁이 될 “뻔”했었다. 적어도 “무쇠팔” 최동원의 별세 뉴스에 예전 기사와 화보들을 찾아보다가 간만에 눈가가 따뜻해지기 전까지는. 
누군가 롯데 야구팬들에게 붙인 “세계에서 가장 극성스러운”이라는 수식어에 크게 공감했던 적이 있다 (‘꼴데’의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 한겨레 21 858호, 2011.5.2). 흑인 감독 로이스터의 퇴출을 반대하며 모금운동을 하고 신문에 연임 광고를 내고, 팀의 연패에 분노하여 버스를 뒤집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숱한 마산구장 해프닝을 만들고, TV 중계를 보다가 밥상을 걷어차고 부자가 사직구장으로 달려가 청문회를 요구하는, 미국까지 와서도 새벽부터 일어나 롯데 경기를 챙겨보는 … 그들은 한국 프로 야구 역사 30년동안 우승은 단 두번에 불과한 롯데를 30년동안 극성스럽게 사랑하는 롯데팬들이다. 

그 극성맞은 팬심의 8할쯤은 1984년에 굳어졌을 것 같다. 그 해 한국 시리즈에서 당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삼성 라이온스와 공인 약체 롯데의 경기에서 최동원은 내리 다섯번을 출전, (했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에 가까운데다가 말그대로 전무후무한) 나홀로 4승을 거둬 롯데의 우승(이라는 대역전극)을 만들었던 그때.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이건만 공식적으로는 (레전드에 걸맞지 않게) “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자의와는 상관 없이 삼성으로 굴욕적으로 트레이드 당했고, 다시 친정팀 롯데로 돌아가고 싶었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기사들을 찾아보니 롯데 구단과 “야구계”는 전설의 투수 최동원을 오히려 “골칫덩이, 이기주의자, 반골”로 취급했던 듯하다. 


그에게 반골기질이 있다는 말은 본인의 인터뷰에서도 등장했다. 부산에서 광역 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잠깐이나마 정치에 발을 들였는데, 1991년, 민자당의 텃밭 경남에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의 꼬마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것이다. 


최동원이 정치를 하려했다는 사실은 그랬구나 하겠지만, 부산 경남지역에서 야당으로 출마했었다니! “3당 야합의 부도덕성을 선거로 심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88년 야구 선수 협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실패하면서 “사회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겨났다고도 했다. (최동원ㆍ노무현, '민주자치 선발투수'의 별이 되다, 프레시안, 2011.9.15). 

구단 입장에서 선수협 결성에 앞장 선 최동원이 골칫덩이였고, 그 괘씸죄로 인해 최동원은 롯데로부터 방출된 듯하다. 높은 연봉을 받는 야구선수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당시 언론이 말했듯 이기주의적 처신이었을까? 그는 왜 선수협을 만들려고 했을까?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날, 1966년 결성된 미국 메이저리그의 프로야구 선수 노조 (MLBPA: Major League Baseball Players Association)는 미국 프로 스포츠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MLBPA 이전에 1886년 선수동맹 시절에서부터 거듭되어온 “실패의 역사”가 더 길었다. 메이저리그의 자유 계약 제도 (FA: Free Agent)는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지만, 1975년까지만해도 구단이 선수들의 운명이 좌우되는 보류선수제도가 일명 노예계약처럼 존재했었다. 선수도 소모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선언이 지금의 MLBPA를 키웠다.

최저 생계비나 연금같은 최소한의 (소모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복지 같은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데에도 개인의 희생은 너무 컸다. 하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번번히 실패하다 2009년 결성된 프로야구 선수노조에게, 최동원이라는 별은 오래도록 반짝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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