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의 역사 (3) 1960년대, 공화당은 왜 남부로 눈을 돌렸나?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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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역사 (3) 1960년대, 공화당은 왜 남부로 눈을 돌렸나?

 

공화당이 “공화당식 보수주의”를 추락하는 미국의 위상을 다시 부활시킬 시대정신으로 마케팅했던 1980년대는 사실 적어도 1960년대에 준비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첫째 근거는 1964년 선거에서 찾을 수 있다. 1963년 암살당한 존 F. 케네디의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현직 대통령 린든 B. 존슨 (민주당)에 맞서 아리조나 상원의원 출신으로 극렬한 반공주의자였던 베리 골드워터가 대선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골드워터는  1964년 선거에서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실험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위대한 사회 (The Great Society)>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 (New Deal), 그리고 그 후임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의 페어딜(Fair Deal)의 계보를 있는 정부 주도의 대규모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었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각각 저소득층과 빈곤층 고령인구를 위한 의료 보장 제도인 메디케어 및 메디케이드라든가, 저소득층 어린이들이 프리스쿨 교육의 수혜를 입도록 한 헤드스타트, 경제적 소외 계층에게 일자리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주는 프로그램,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정책 등 의료, 교육, 일자리, 주택에 걸친 복지 혁명이었다. 이에 대한 골드워터의 입장은 ‘정부 예산을 낭비하고 저소득층의 도덕정 방종을 방기하며 미국인(!)의 자유와 를 제한하고 자본주의의 본령을 망각한 망국적 포퓰리즘’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어쨌거나 이 선거는 1950년대 중반 처음으로 창간된 보수주의 지식인들의 정기간행물인<National Review>, 1960년 결성된 보수주의 운동인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 (YAF, Young Americans for Freedom),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의 당선 이후 극도의 위기감을 느낀 여러 갈래 보수주의 세력이 정치적인 세력으로 결집하게 된 혁명적인 사건이었고,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의 아이콘으로 남게 된다. 혹은 공화당내의 가시적인 보수혁명의 시발점 역시 1964년 선거가 된다. 어떤 보수주의자들은 이 선거를 지칭하여 영광스러운 패배 (Glorious Disaster)라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 대중들의 머리속에는 레이건이라는 빅 네임에 비해 존재감이 희박한 골드워터지만, 1980년대 레이건의 선거 켐페인은 좀 심하게 표현하면 골드워터의 1964년 선거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였다.

 

물론, 이 선거에서 적어도 대선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골드워터가 남부 다섯 개 주에서 승리를 얻은 것 외에는 린든 존슨에게 참패했다. 하지만 골드워터는 프레임을 획득했다. 바로 2년 뒤 치러진 중간 선거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으나 민주당의 참패였다. 존슨 대통령이 추진해왔던 ‘복지국가’에 대한 집중포화에 탄환을 제공한 것은 골드워터였을게다. 받았 훗날 대통령이 되는 레이건 역시 1966년 캘리포니아의 주지사로 당선된 골드워터 키즈(!)였다.

 

1964년 선거에서 골드워터의 캠페인에서 주목할 또다른 요인은 “남부 5개 주를 공화당이 선점”했다는 데에도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만해도 남부는 민주당에 몰표를 주던 텃밭, 이른바 Solid South 였다. 그런데 공화당의 확실한 보수화가 진행되던 시발점인 1964년 선거에서 공화당을 선택한 단 다섯 개의 주가 남부라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동부, 북부의 정당이었던 공화당이 남부로 그 외연을 넓혔고, 현재의 남부가 공화당의 텃밭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남부가 공화당의 골드워터를 선택했던 것은 린든 존슨 재임기에 통과한 민권법 (Civil Right Act of 1964), 그리고 1965년의 투표권법 (Voting Right Act)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반발이라고 하겠다. 과거, 노예제를 찬성했던 남부 백인들의 정서는 여전히, 공공연히 인종차별적이었고, 민권운동의 흐름과 이를 수용하눈 법제적 변화에 탐탁치 않았고, 그 잠재된 불만이 표로서 표출되기 사작했다. 물론 민주당의 복잡한 정체성 속에는 골수 남부인의 정서와, 민권운동을 지지하는 정서, 존슨의 베트남전에 찬성하는 입장과 반전의 입장, 진보와 보수의 정서가 고루 존재했었고, 이를 대하는 인종차별주의적 남부인들의 정서도 복잡다단했을 것이다.

 

이 복잡한 정서를 제대로 간파한 것은 1968년 닉슨의 “남부 전략”이었다. 남부 백인의 보수적인 정서를 겨냥한 닉슨의 대통령 선거 결과는 압승이었다. 인종차별 이슈를 차치하더라도, 남부는 당시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영향으로 팽배해있던 진보적 분위기에 정서적, 문화적 이질감을 느꼈다. 또한 상대주의, 다원주의,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세속화된” 기독교의 유연화에대한 반발로서 남부의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도 보수주의의 흐름에 기댔다. 이듬해 닉슨은 이듬해에는 자신감있는 어조로 (이러저런 변화를 요구하는 진보의 흐름과 달리) “침묵하는 다수 (Silent Majority)”는  여전히 보수를 선호한다고 연설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공화당이 보수주의를 프레임화하고, 보수적인 정서가 더욱 강했던 남부를 전략지역으로 삼았던 것은 매우 영리한 전략이었음에는 틀림 없다. 그리하여 1960년대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문화전쟁이 벌어지던 때였다.

 

(다음 칼럼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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