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재판: 공포의 자가당착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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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재판: 공포의 자가당착

 

1925년 7월 10일, 미국 역사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재판중의 하나가 벌어진다. 일명 “원숭이 재판”이라고도 불리는 스코프스 재판 (정식 명칭은 The State of Tennessee v. John Thomas Scopes)이다. 

 

버틀러법: 성경을 그대로 교육하라

 

사건의 발단은 테네시주가 “주의 지원을 받는 어떤 학교에서건 성경의 천지창조론을 부정하고, 인류가 동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과학 이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하며, 어길 시 경범죄로 처벌한다”는 버틀러법 (Butler Act)을 통과시켜, 공립학교의 진화론 교육을 불법화한 데에 있다. 무려 20세기의 일이다. 

 

버틀러법이 통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고등학교 과학 교사였던 토마스 스코프스 (Thomas Scopes)가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뒷얘기에 따르면 스코프스가 버틀러법을 어긴 것은, 버틀러법과 관련된 이슈를 공론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지역의 사업가였던 조지 라팔레 (George Rappalyea)라는 인물과 공모하에 ‘설계된 것’이었다. 

 

어쨌건 스코프스의 의도는 적중했다. 이 재판은 원숭이 재판이라는 별칭을 얻으면서 전국의 이목을 모았다. 이 재판의 무대가 된 테네시주의 주민 1800명 가량의 소읍 데이튼 역시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수 많은 방청객과 언론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데이튼의 거리에는 부흥회 텐트가 차려졌고 버틀러법에 대해 위헌판결이 내려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기도 모임이 계속되기도 했다. 급기야 나중에는 야외에서 재판을 진행해야 할 정도였다고도 한다. 사실 데이튼은 축제분위기였다. 노점에서는 성경과 원숭이 인형이 불티나게 팔렸다. 

 

모더니즘 VS. 기독교 근본주의 

 

이토록 뜨거운 관심을 받은 “원숭이 재판”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갈등을 외피로 과학과 종교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 (Fundamentalism)와 모더니즘 (modernism)간의 갈등이 노출된 첫 사법적 사례로 기억된다. 

 

이 흥행 최고의 재판에서 양 측의 변호사들도 화젯거리였다. 의도적으로 체포된 스코프스는 변론을 위해 전미 시민 자유 연합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ACLU는 시카고의 스타급 변호사인 챨스 데로우 (Charles Darrow)를 선임하여 스코프스를 지원하였다.  

 

근본주의 그룹의 (기소측) 변호사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었다. 금본위제가 주요 이슈였던 1896년 대선을 앞두고 “금본위제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려 한다면, 이는 노동자와 농민의 머리 위에 금으로 만든 면류관을 내리 찍는 것”이라는 황금 십자가 연설로 스타덤에 올랐던 그 브라이언이다. 브라이언은 1896년, 1900년, 1908년 세 번에 걸쳐 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였고, 19세기 말 인민주의자들과 20세기 초반 개혁가들이 주창했던 상원 선거의 직선제 개헌, 연방 소득세의 도입, 금주법 도입, 여성 참정권 승인 등에서 큰 공헌을 했던 인물이며, 1차 대전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며 사임하기까지 우드로 윌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 분의 약력을 할애하여 쓰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원숭이 재판에서 근본주의자 그룹을 대변했던 것은, 브라이언 개인의 신앙고백일 수 있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재앙이 된다. 원고측 변호인이었던 대로우는 “성경무오류설”에 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이 논리적으로 모순임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성경은 그자체로 해석해야한다고 믿는다”고 재판정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브라이언에게 창세기의 몇몇 구절을 어찌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시간 스케일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그 하루를 반드시 24시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뱀이 이브를 유혹한 죄로 배로 기는 벌을 받기 전에 네 발로 걸었는지는 경험해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브라이언의 답변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그의 신앙고백과 논리적으로 충돌했다. 

 

대중적 조롱의 대상이 된 브라이언은 이 변론 며칠 뒤인 같은 해 7월 26일 사망했다. 재판 결과 스코프스는 버틀러법 위반의 죄목으로 100달러의 벌금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광신과 무지가 조용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미 중세 때에도 있었던 학문을 파괴하려는 몰염치하고 파렴치한 시도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때와 다른 단 한 가지는 이제 더 이상 피고인을 화형하지 않는다는 것 뿐입니다…. 스코프스가 아니라, 문명이 법정에 소환된 것입니다.” (챨스 대로우) 

 

공포의 자가당착 

 

결국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념 혹은 이념을 반영한 버틀러법은 스스로의 파멸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기독교 우파가 주도했던 테네시주 교육위원회는 왜 당시 그런 법을 제정했을까? 

 

나는 그 한가지 답이 다름에 대한 공포, 혹은 그로 인한 과잉 방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기독교 우파가 견지했던 종교적 신념과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과학에 대한 반감, 그리고 그로 인해 기반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극단적인 자기 (문화) 방어의 형태로 보수적 전통의 테네시에서 나타난 것이 버틀러법이었다. 

 

국정원의 “댓글공작”을 통한 대선개입 논란을 보면서도 그 생각이 들었다. 다름에 대한 공포, 그리고 (기득권과 혼동하는)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극단적 자기방어가 낳은 자/가/당/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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