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Klux Klan의 어제와 오늘 (1)
정식명칭보다는 약어인 KKK로, 아니 그 보다는 할로윈 유령마냥 눈만 뚫린 하얀 두건, 십자가, 횃불과 같은 이미지로 기억되는 Ku Klux Klan 쿠 클럭스 클랜. 잘 알려져 있다시피 KKK는 과격한 백인우월주의 단체이며, 한때 미국 전역에 약 400만명에 달하는 회원을 거느렸던 단체이기도 하다. 오늘은 그 KKK를 조명해보려 한다.
탄생: 재건시대, 증오에서 탄생한 KKK
1865년 4월 9일. 남북 전쟁의 최전방이었던 버지니아 북부의 애포매톡스 (Appomattox) 법원 청사 근방에서 지난 5년여간 총사령관으로 남부 연합군을 이끌던 로버트 리 (Robert Lee)장군이 항복하면서 남부 연합군은 하나씩 무기를 내려놓게 된다. 같은 해 5월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가 체포당했다. 연합군의 항복이 여러 전선에서 차례로 이어졌다. 1865년 11월 6일, 남부연합 해군 소속 CSS 셰넌도어 (CSS Shenandoah)호의 항복을 마지막으로 남북전쟁은 끝이 났다.
5년을 넘게 끌었던 전쟁이 결국 북부의 승리로 끝났을 때, 남부 전역은 초토화되었다. 남부 백인들의 상실감과 박탈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게다. 북부-공화당에 대한 그들의 반감은 한때 남부 대농장주들의 소유물로 취급되던 “과거 노예”이자, 현재의 “해방인 (freed men)”이 되었던 흑인들에게 향했다. 의회 중심으로 보다 강경한 재건 정책이 입안되기 전까지, 1865년에서 1866년 사이 많은 남부 주들이 앞 다투어 과거의 노예 단속법 (Slave Code)의 주어만 살짝 바꾼 흑인 단속법 (Black Code)을 통과 시켰다.
KKK가 태어난 것도 이즈음이다. 시작은 퇴역군인들의 친목모임이었다. 과거 남부 연합군의 일원으로 연방 (북부)에 맞섰던 퇴역군인들 일부가 테네시주에서 몇 차례의 모임을 가지면서 남부인들의 정치적인 권리 확장이라든가, 전쟁 이후 구겨진 자존심의 회복을 이야기하던 와중에, 남부 연합 재건의 결의를 다짐하며, 전쟁당시 남부 연합의 기병대장 출신 네이턴 포레스트 (Nathan Forrest)가 주도하는 비밀조직이 결성되었다. 1865년 12월 24일다. (오늘 칼럼과는 별 연관이 없다만, 유명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포레스트”의 작명은 바로 네이턴 포레스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였다.)
어쨌거나 증오에서 태어난 KKK는 흑인에 대한, 그리고 흑인 해방을 지지했던 백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공갈, 협박, 집단 린치 혹은 방화와 같은 극단적 폭력을 통해 드러냈다. 특히 흑인들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는 것을 철저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KKK활동에는 인종주의에 대한 흡사 종교적인 맹목성까지 가미되곤 했는데, 폭력의 수위가 극에 달하면서 연방 의회는 클란법 (Klan Act, 1870)을 통과시켜 KKK의 폭력행위를 단속하기에 이른다.
부활: 불관용의 시대, 그리고 미국이라는 편협한 정체성
1870년대 이후 남부는 KKK 활동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사회 전체의 인종주의 성향이 강화되긴 했었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로는 잠잠했던 KKK가 1915년, 군인 출신의 감리교 목사 윌리엄 시몬스가 조지아주 애틀란타 근방 스톤마운틴에서 2차 쿠 클럭스 클랜의 출범을 선언하면서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재건되었다.
부활한 2차 KKK는 과거처럼 흑인에 대한 적대감 뿐만 아니라, 유태인과 남동부 유럽 출신 이민자, 아시안, 카톨릭교도, 여성 참정권 운동가 등 WASP ( White Anglo-Saxon Protestant) 남성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미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렇게 규정된 “적”들에 대한 집단적인 린치와 테러가 횡행했다. 게다가 과거 KKK가 남부의 비밀결사 조직이었다면, 새로 결성된 2차 KKK는 1920년대 전국적으로 약 4백만명 가량의 회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심지어 이들의 헤드쿼터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세워질 정도였으며, 공공연히 KKK 단원거나 KKK활동을 지원하는 정치인들이 주정부와 의회로 진출했다. 이렇게 KKK의 광기에 가까운 테러는 암묵적으로 용인되었 이 인종차별적인 증오범죄 조직에 개신교 목사인 KKK단원이 약 4만명에 달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대목이다.
2차 KKK는 왜 결성된 것일까? 미국영화사의 첫 장편으로 기록된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이 1915년 초반 개봉되었다고 한다. 그리핀스가 감독한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 그리고 영화사적으로 중요하지만, 남북전쟁과 재건시대의 흑인에 대한 왜곡되고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KKK 단을 영웅적으로 미화시켰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국가의 탄생이라는 영화 때문에? 1915년 이후 세를 불렸던 2차 KKK는, 산업혁명과 이민의 물결, 그리고 개혁시대를 거쳐 다다른 1차 대전 전후라는 시대가 만든 괴물이었다. 새로운 이민에 대한 혐오에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문화적 순혈주의가 “미국은 너희들의 나라가 아니다”라고 하는 아집에 가까운 애국심(!)이 만들어냈던.
2차 KKK역시 1925년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사실상 와해 되는데, KKK가 내세웠던 명분때문이라기보다는 횡령, 탈세, 파벌싸움 등 내부적인 문제가 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