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Klux Klan의 어제와 오늘 (2)
지난 칼럼에서 남북 전쟁후 재건시대 남부 백인들의 백인 우월주의와 흑인들에 대한 증오감이 뒤범벅되어 KKK가 탄생했으며, 1920년대 국수주의적 반이민 정서가 “앵글로 색슨 개신교 남성”이 아닌 모든 정체성을 배격하는 2기 KKK운동으로 확대 발전했다가 자중지란으로 소멸했던 간략한 역사를 언급했다.
민권운동에 반발하다 - KKK의 르네상스기
하여간에 KKK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1950년대, 물론 급격하게 회원수가 줄어들긴 했으나 매카시즘의 물결을 타고 KKK가 재등장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또한 KKK 의 저변에 흐르는 정서적인 유사성때문에 나치즘과 본인들을 차별화하기가 힘들때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KKK는 인종차별 테러집단의 정체성을 복원한다.
1950년대에 발생한 흑인 혹은 사회 활동가를 대상으로하는 빈번한 방화, 살인, 집단 폭력 사건의 언저리에는 자생적으로 다시 부활한 KKK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령 1951년 크리스마스 이브. 플로리다 주 밈스 소재 가정집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해 해리 무어와 해리엇 무어는 전미 유색인종 지위향상위원회 (NAACP)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들로 폭탄 테러는 명백히 이들을 타겟으로 한 것이었다.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에 이르는 흑인 민권 운동의 시기, KKK의 증오범죄 역시 극단을 달렸다. 이 시기 KKK의 활약상은 광기에 가까운 노골적인 인종주의의 민낯이었다. 가령, 1960년대 초반 버스로 여러 도시로 옮겨 다니며 인종분리 정책의 문제를 고발하고 흑인들의 투표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던 프리덤 라이더 (Freedom Rider)들이 새로운 도시에서 버스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맞닥뜨렸던 현실이 바로 KKK의 무차별적 린치였다. 물론 이 상황은 TV로 생중계되어 KKK식의 인종주의가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인식을 전국적으로 가중시켰지만.
1960년대에도 KKK멤버들은NAACP 활동가들을 타겟으로 한 참혹한 살인을 벌였다. 대표적인 한 케이스가 바로 메드거 에버스 (Medgar Evers) 암살사건이다. 메드거 에버스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미시시피 대에 입학을 거부당한 전력이 있는 NAACP 활동가다. 후에 에버스는 제임스 메러디스 (James Meredith)가 미시시피 대학에 등록할 수 있도록 돕고, 대학의 인종분리정책을 종결시키기 위한 활동을하기도 했다. 때는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기 위해서 당시의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까지 나서 강의실을 봉쇄했던 그런 시기.
1963년 6월 12일 아침. J F 케네디 대통령의 민권운동을 지지하는 연설이 TV로 중계되었다. 그 날 밤. <짐크로우는 사라져야한다>는 문구를 내달고 다니던 에버스는 자신의 집앞에서 총격을 받았다. 에버스를 살해한 범인이자 “백인 시민협회 (White Citizen Council) 라는 이름의 KKK단원이었던 바이런 벡위드 (Byron De La Beckwith)는 1994년에야 유죄가 인정되었다. 에버스가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는 아직 사망 전이었으나 병원측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미시시피에서 흑인들을 대상으로 유권자 등록운동을 벌이던 두 명의 백인 활동가와 한명의 흑인CORE (Congress of Racial Equality) 소속 활동가가 KKK 단원에 의해 살해되었던, 그리하여 미시시피 여름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벌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오늘의 역사가 공들여 기록하지는 않지만, 1960년대 당시 미시시피에서는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의무의 살인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그러나 FBI를 비롯한 수사당국은 KKK 단원들의 범죄행위를 적발하는 데에는 상당히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21세기의 KKK: 변하지 않는 것들
물론 민권운동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KKK는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KKK는 존재한다. 미국 내에서 가장 오래된 증오범죄 그룹에 뿌리를 둔 오늘날의 KKK는 “우리는 증오가 아니라 (가정과, 백인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랑의 그룹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백인에 대한 전쟁에 맞서 싸우겠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는 그래도 진보했고, 그만큼 KKK역시 반세기 전까지처럼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기 힘들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회가 용납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런데 KKK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이 달라졌을까? KKK는 언제나 나와 피아의 차이를 부각시켜, 피아를 타자화하고, 배제함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부각시켰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분노와, 공포, 죄의식과 우월감 등이 뒤섞인 복잡한 상태에서,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 기준이 윤리나 정의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균질성이 될 때, KKK 스타일의 극단적인 집단 병리가 나타나곤 했다. 폭력을 배격한다지만, 여전히 “우리”는 “미국”을 사랑하는 (자격이 있는) 백인이라는 정체감에서 시작하는 KKK는 유전자가 건강할 수 없다.
그리고 오늘.
9월 말엔가. 제복입고 썬글라스 낀 자칭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이라는 중년들의 활약(!)을 인터넷으로 접했다. 미군정기에 활동했던, 백색테러 조직 서북청년회를 다시 만들겠다는 발상에, 그저 끔찍하고 놀라웠다. 그들이 첫 번째 한 일은 세월호 노란 리본의 철거라는 사실을 지켜보면서, 서청 재건위원회가 지켜야 할 ‘체제’의 앙상함에 가슴이 한 번 더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