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독감 그리고 전쟁

by help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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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독감 그리고 전쟁

 

cold_comfort_01.jpg1914년 6월 28일 –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공 부부가 18세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를 발판으로 삼아 발칸 반도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세르비아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함께 범슬라브제국을 구성하기를 원했다.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프린치프는 슬라브 민족주의자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팽창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 

 

일명 사라예보 사건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유럽은 제국주의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고, 러시아는 영국 및 프랑스와 군사 협력 관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복잡한 상황이 얽혀, 사실상 대단한 대의 명분도 없이 세계 제 1차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제국주의의 팽창이 가져온 이 전쟁에 대해 미국은 개전 초기 중립을 표방했다. 그러나 점차로 미국의 무게 중심은 영국-프랑스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특히 영국의 해상 봉쇄에 대항한 독일군의 잠수함 공격이 상선과 여객선, ‘중립국 선박’을 포함하는 무제한적인 공격으로 확대되면서 미국 역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1차 대전에 개입하게 된다. 

 

제국주의적 탐욕에서 시작한 1차 대전은 여러 모로 끔찍한 전쟁이었다. 가령, 1차 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은 참호(구덩이)를 구축하고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했는데, 군인들은 비가 내리면 물과 진흙, 그리고 배설물 등으로 질척거리는 참호 속에서 고통스럽게 이동해야 했고,  그대로 익사해버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수습되지 못한 동료의 시신이나 머리 위로 떨어질 수 있는 포탄 공습으로 인해 병사들은 극도의 심리적 공포까지 겪어야 했을 것이다. 

 

1차 대전을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만든 또 다른 요인은, 이 전쟁이 유럽 각국의 산업 혁명 이후에 벌어진 전쟁이었던 만큼 현대식 살상 무기들이 대거 도입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독가스, 폭격기와 전투용 잠수함, 탱크와 같은 ‘신기술’이 도입된 덕에, 대량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사상자의 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론 최전선의 상황은 사기 저하를 우려하여 항상 긍정적으로 부풀려지거나 날조된 상태로 보고가 되긴 했지만. 

 

그런데 이렇듯 참혹한 전쟁 중에, 전투 중 희생자보다 더 많은 군인 그리고 민간인들이 ‘독감’으로 죽어갔다. (1차 대전에서 희생된 군인들 중 절반은 독감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세계 16억 명의 인구 중 약 20~40%는 이 독감에 감염되었고, 그 중 대략 5천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67만 5천 명이 바로 1918년의 독감으로 사망했다. (http://www.flu.gov/pandemic/history/)

 

1918년의 독감은 일명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곤 했는데, 스페인에서 먼저 발병한 전염병이어서가 아니라 전쟁에 참여 중이었던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에서 먼저 보도가 되고, 또한 비교적 상세히 독감 소식을 전했던 탓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1918년 여름, 독감이 전세계적으로 대유행이 되면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할 것 없이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했다. 독감에 감염된 많은 사람들이 고열과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혼수 상태에 빠지거나, 폐수종으로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버리거나 하면서 사망했다. (1918년의 살인적인 독감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최근인 2005년으로, 스페인 독감의 원인균은 최근 10여년 간 사스, 신종 플루, 조류 독감, 그리고 메르스 덕에 유명해진 H1N1형 바이러스라고 한다.) 

 

그런데 1918년의 살인적인 독감은 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전세계에 전파되었을까?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전쟁’이다. 1918년 초, 영국과 미국 군의 캠프에서 상당수의 병사들이 가장 먼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만 해도, 감염은 쉽게 되지만 사나흘의 열과 오한, 근육통 정도를 앓고 가볍게 지나갔기 때문에, 독감의 파급력을 우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병력의 이동, 그리고 참호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감내해야 하는 전선의 상황 등은 빠르게 바이러스를 전파했고, 바이러스가 변종을 거치면서 점점 더 어느 순간 바이러스는 어떤 대량 살상 무기보다도 치명적인 형태로 확산되고 있었다. 

 

게다가 장기화된 전쟁 동안 충분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한 채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일반 병사들의 면역력도 매우 저하된 상태였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이 바이러스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 병사들이 고국땅을 밟을 때, 강력해진 병원균도 함께 그들의 고향땅을 밟았을 것이고 삽시간에 치명적 바이러스의 전세계적 대유행이 벌어졌다. 도시 기능이 마비되거나,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어지간한 국가 규모의 인명을 잃어버리는 일도 속출했다. 적어도 2년 간, 바이러스의 위력이 약해질 때까지 그렇게 인류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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