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 대통령 선거의 잡다한 역사 (1)
며칠 전 공화당의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와 민주당의 대선 후보 힐러리 간의 1차 대선 후보 토론회가 열렸다. 이 칼럼을 계속 쓴다면 언젠가는 올해 각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과 본선 후보들의 얽히고 설킨 정치사와 사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가령 왜 남부의, 혹은 러스트 벨트의 가난한 백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했을까, 힐러리 클린턴이 공화당원이었던 대학생 시절 선거를 도왔던 베리 골드워터는 누구였을까, 혹은 엊그제 같은 과거의 샌더스 돌풍은 어떤 역사적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까?
어쨌거나 미국 대선에서 어떤 지역 정당의 후보가 선출되었고, 어느 정당이 어떤 특정 지역에서 특별히 우세했었는지, 각 정당은 어떤 이슈를 쟁점화했었는지를 살펴보면, 미국 정치가 훨씬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대선을 한 달 여 앞 둔 오늘, 지나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칼럼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긴 이유다.
만장 일치로 당선된 워싱턴과 먼로
1789년 초대 대통령 선거는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초창기 미국의 대선은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에 의한 선출방식이었고, 선거인단이 각각 두 표씩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모든 선거인단은 조지워싱턴에게 한 표씩을 던졌고, 나머지 열 한 명 중 각기 다른 한 명에게 또 다른 한 표를 행사했다. 조지 워싱턴은 1792년 선거에서도 모든 주의 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임기 말엽 세 번째 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장기 집권이 초래할 정치적 부작용을 우려하며,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1951년 비준을 받게 되는 수정 헌법 22조는 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수정헌법 22조 없이도 워싱턴의 선례 덕에 대통령 임기는 암묵적으로 2회 이내로 굳어져 있었다. 1932년 초선에 성공해서 1944년 선거까지 무려 4선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까지는.
선거인단 득표에서 만장일치는 아니지만 사실상 만장일치로 당선된 또 하나의 대통령이 있다. ‘먼로 독트린’으로 유명한 제임스 먼로. 버지니아 상원의원 출신으로 민주 공화당 소속이었던 먼로는 전임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 재임시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s)이었다. 먼로의 초대 선거였던 1816년 대선에는 연방주의당(Federalist Party)에서 뉴욕 상원의원 출신 루퍼스 킹이 후보로 출마했지만, 먼로가 킹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메디슨 대통령 재임기 영국을 상대로 치른 1812년 전쟁의 여파로 ‘친영’의 성격이 강했던 연방주의당이 거의 붕괴 위기에 처해 있었던 탓이다. 급기야 먼로의 재선인 18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연방주의당은 공식 후보를 선출할 수 없었다. 먼로는 선거인단표 231개의 선거인단 투표 중 228개를 획득하며 쉽게 재선에 성공했다.
정당의 내부 분열과 대통령 선거
1817년 7월,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보스턴에 방문했을 당시, 과거 연방주의당의 기관지 성격이 짙었던 컬럼비아 센츄럴의 기자 벤자민 러셀은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새 대통령을 기쁘게 맞이하는 보스턴 시민들을 보며 “화해의 시대 (Era of Good Feelings)”라는 표현을 썼다. 민주공화당의 적장자와 같은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과거 연방주의자당의 총본산과도 같았던 보스턴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후 <화해의 시대>는 1815년 무렵 시작된, 영미전쟁후의 강화된 국민주의(Nationalism)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표현이 되었다. 연방주의당-민주공화당이 대립하는 1차 정당시스템이 민주공화당 1당 체제로 전환되었던 것도 화해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징후였다.
하지만 1824년 선거는 그 ‘화해’에 이미 균열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24년 선거에 출마한 네 명의 후보자들은 모두 민주공화당 소속이었지만 정당 지도부로 구성된 의회 코커스에서 지명된 윌리엄 크로우포드는 동부의 일부에서, (연방주의당이 배출한 유일한 대통령이자) 2대 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의 아들인 존 퀸시 애덤스는 북동부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다. 또한 영미전쟁의 영웅인 앤드류 존슨은 남부와 서부에서, 헨리 클레이는 서부의 일부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다. 1824년 선거가 일명 “지역의 아들”들의 선거(favorite son’s election)로 불리는 까닭이다. 후보가 난립하다보니 후보간의 비방도 난무했고, 지역의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대중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앤드류 잭슨과 2위를 차지한 존 퀸시 애덤스 간의 선거인단 표 차이는 불과 15표였고, 1위였던 앤드류 잭슨의 표는 여전히 대통령에 선출되기에 충분한 선거인단 득표수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수정헌법 12조에 따라 하원이 대통령을 결정하게 되었다. 득표수 4위를 차지한 헨리 클레이가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 상항에서, 하원 의장 출신인 헨리 클레이가 애덤스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실제 대통령은 득표수 2위였던 애덤스가 차지했다. 이 선거는 앤드류 잭슨 지지그룹이 민주당으로, 클레이와 애덤스 지지그룹이 휘그당의 전신인 국민 공화당(National Republican Party)으로 분화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824년 선거 이후에도, 정당 내부의 분열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끼쳐왔다. 가령 공화당 내의 계파 갈등이 비극을 초래한 1880년 선거, 공화당의 전직 대통령 시오도어 루즈벨트가 새 당을 창당해 나가면서 민주당의 윌슨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준 1912년 선거, 민주당의 내분이 극에 달했던 1948년 선거와 1968년 선거 등.
(다음 칼럼에 계속)